SK하이닉스 600조원, 삼성전자 450조원, 현대차 125조원, LG 100조원.

최근 국내 주요 기업들이 밝힌 투자 규모이다. 한미 관세 협상에 따른 대미 투자 확대로 국내 일자리 감소와 산업 공동화 우려가 불거진 가운데 기업들이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역대급 투자 계획을 내놓은 것이다.


국내 경제 살리기겠다는 명분 외에도 인공지능(AI)·로보틱스 등 미래 첨단산업 분야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포석도 깔려있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대규모 투자를 통해 초격차의 기반을 닦겠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과 중국, 일본 등이 글로벌 시장의 패권을 잡기 위해 국가차원에서 전문학적인 투자를 단행하며 '쩐의 전쟁'을 본격화하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의 투자는 반가운 일이다.


문제는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정부 정책에 있다. 첨단산업에 수백조원을 투자하기 위해선 자금조달이 절실하지만 관련 규제를 해소해주는 일에는 '대기업 특혜'라는 시비에 휘말려 소극적인 모습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산분리 규제 완화 논의다. 이재명 대통령조차 금산분리 완화가 필요하다고 언급했지만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최후의 보루'라며 반대하고 있다.


앞서 이 대통령은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를 만난 자리에서 "AI는 전략적으로 워낙 중요한 산업이고 천문학적 투자재원이 필요하다"며 "독점 폐해가 없는 안전장치가 마련된 범위 내에서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검토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이 같은 발언에 대해 "AI는 전략적으로 워낙 중요한 산업이고 삼성과 SK가 점하고 있는 위치, 우리나라 산업 정책이나 제조업, 실물경제, 미래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다른 영역으로 번지지 않는 안전범위 내에서 현행 규제를 재검토할 수 있다는 지시를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 위원장은 "금산분리 원칙을 통해 재벌의 금융기관 개인 금고화, 대기업 경제력 집중, 총수일가 지배력 확장 등의 문제를 더 심화시키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며 "근간을 훼손하면 안 된다"고 했다. 대통령은 하자는데 주무부처 장관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금산분리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분리하는 규제로 대기업이 금융회사를 지배해 편법 승계 등에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82년 도입됐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일반지주회사는 금융 자회사를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2021년 12월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일반지주회사의 벤처캐피털(CVC) 보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는 있으나 조건이 까다롭다.

지주회사의 CVC는 지분 100% 완전 자회사 형태로만 설립 가능하고 부채비율은 자기자본의 200% 이내로 제한한다. 투자업무만 영위 가능하며 총수일가 지분 보유기업, 그룹 계열사,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 회사에는 투자가 제한된다. 펀드 조성시 외부자금 비중이 40% 이내로 제한하고 계열사나 총수일가 출자 금지, 해외투자는 CVC 총자산의 20% 이내에서만 허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규제를 완화하거나 기업 펀드 운융사(GP) 허용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다. 금산분리 규제가 완화되면 각 기업이 펀드를 조성해 외부 자금을 끌어들이기에 용이하다.

반도체 분야 52시간제 적용 예외도 논란이다. 프로젝트 단위로 기업들이 근무시간을 노사 협의하에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자는 것이지만 노동계의 반발에 막혀 국회 조차 이를 외면하는 상황이다.

최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2030년 한국의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설 우려가 크다"며 계단식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호소한 바 있다. 그는 "한번 마이너스 성장으로 들어가면 모든 리소스가 다 사라진다"며 "기업 사이즈로 규제하던 시대는 과거 성장 시대엔 상당히 의미가 있었지만 이젠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각종 논리 휘들려 관련 법안 완화를 외면하기보다는 현장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기업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 투자의 '골든타임'을 살릴 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