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달력 있어?"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

휴대폰 앱 하나면 일정 관리가 충분한 시대지만, 은행 달력만큼은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집에 걸어두면 돈이 들어온다는 말은 반쯤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어쩐지 희망을 걸고 싶은 오래된 믿음이기도 하다. 연말이 되면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은행 달력은 귀한 몸이 돼 웃돈을 얹어 거래된다.


은행은 돈을 다루는 금융기관을 넘어 서민들의 거실과 책상 위까지 들어왔다. 연말이면 부지런히 새해를 맞이한 은행 달력이 가장 사적인 공간에 걸린다.

이는 사회가 은행을 단순 금융기관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은행이 주는 안정감에 기대 한 해를 정리하고 다음 해를 준비하는 연말 풍경이 반복되는 이유다.


내년 은행들의 달력을 채우는 건 다름 아닌 '생산적 금융'이다. 정부의 '생산적 금융 대전환'에 맞춰 은행들은 대규모 관련 투자 계획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이제 은행은 '돈을 얼마나 벌었는가'보다 '돈을 어디로 흘러가게 했는가'로 평가받는다.

부동산 등이 아닌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혁신 기업과 미래 산업으로 자금이 흐르도록 만드는 생산적 금융은 은행의 선택이 아닌 역할에 가깝다.


신한은행은 초혁신경제·국가핵심 산업 및 제조업 등을 대상으로 총 6조9000억원 상당의 '생산적 금융 성장지원 패키지'를 가동했고 하나은행은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에 98억원을 추가 출연해 4500억원 규모의 생산적 금융을 본격화한다.

우리은행은 기술주도 신사업과 성장기반 분야의 중소·벤처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기술보증기금에 50억원을 특별 출연하고 약 2000억원 규모의 대출을 공급할 예정이다. KB국민은행 역시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에 총 140억원 규모의 출연을 통해 협약 보증서를 담보로 약 4000억원 규모의 대출을 지원한다.


다만 이를 둘러싼 환경은 녹록지 않다. 고환율 기조가 장기화되며 자금 조달 비용과 건전성 부담이 커졌고 경기 둔화 속에서 대출 리스크 관리에 대한 압박도 커지고 있다. 급격한 자금 공급 확대 역시 은행에겐 부담이다.

하지만 은행을 향한 사회적 기대는 줄지 않는다. 은행은 이제 여신·수신 기능을 넘어 자금이 우리 사회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를 보여줘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실적 방어는 물론 금융 생태계 관리까지, 내년 은행들의 달력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빼곡하게 채워질 전망이다.

내년 연말에도 사람들은 또다시 은행 달력을 찾을 거다. 은행이 지켜온 신뢰가 증명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강한빛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