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북한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은 당시 무장공비들이 사용한 무기들의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1968년 1월21일 새벽 북한 정찰국 소속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이 벌어졌다.

북한 공작원 31명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에서 300m 떨어진 서울 종로구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했다. 북한 공작원이 서울 한복판까지 침투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침투한 31명 중 29명이 사살됐고 박재경으로 알려진 투항 1명은 당시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을 사살하고 북한으로 도망쳤다. 이후 인민무력부 부부장까지 역임했고 은퇴 후 명예직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마지막 투항자 김신조는 침투 목적에 대해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밝혀 국민을 놀라게 했다.

북한, 공작원 보낸 이유는?

북한은 남한 사회 혼란 야기를 위해 공작원 투입을 계획했다. 사진은 기자회견 중인 투항한 북한 공작원 김신조의 모습. /사진=e영상역사관 영상 캡처


북한은 공작원을 보내 청와대를 기습한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고 미국 대사관과 국방부를 공격해 요인을 암살하는 등 남한 사회 혼란을 야기하기 위한 작전을 짰다. 아울러 교도소를 공격해 탈옥시킨 후 죄수들을 월북시켜 반정부 세력 의거를 계획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몇백으로 계획했던 공작원을 30여명으로 축소했고 청와대 급습만 실행에 옮겼다. 침투, 습격, 탈출조로 나눠 청와대 내부를 공격하고 철수한 후 차량을 탈취해 도주하는 것을 불과 3~4분 만에 끝낼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실행하진 못했다.


북한이 이같은 계획을 구상한 가장 큰 이유는 국제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인해 냉각기였던 한국과 일본의 외교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 미국, 일본 협력이 강조되면서 북한은 점차 고립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진행 중이었던 시기에 한국군이 파병되자 사회주의 국가였던 북베트남은 김일성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한국, 미국, 일본이 점차 가까워지자 김일성은 외교 관계를 염려해 북베트남 파병 요청을 거절했다. 대신 남한이 베트남 파병을 못 하게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에 따라 북한은 공작원을 보내며 공격을 계속했고 그러면서 청와대 침투 계획인 1·21 사태를 주도하게 됐다.

유일하게 투항한 김신조… 마지막은 어땠을까?

무장공비 공작원 중 유일하게 투항한 김신조는 전향 후 2년 동안 효자동 방첩대에서 조사받았다. 그는 한국군에 많은 정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4월10일 풀려났다. 한국으로 전향한 그는 1970년대 초부터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거주하며 중앙정보부 감시를 받았다.


한국에 터를 잡게 된 김신조는 결혼 후 가정을 꾸렸으며 1996년 목사 안수를 받아 종교인으로 살아갔다. 그는 지난해 4월9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이 목사로 활동했던 교회 측은 사망 원인을 건강 악화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