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리포트]① "법안 찍어내는 공장"…매년 6500건 쏟아내는 졸속 국회
[법안 폭주하는 국회]
김성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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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대한민국 국회에선 매년 6500건의 의원 발의 법안이 쏟아진다. 의원 한 명이 내놓은 법안은 연평균 22건으로, 주요 선진국을 압도한다. 법안의 홍수 탓에 법안 하나를 심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3분에 불과하다. 졸속입법은 과잉규제와 입법공백을 낳는다. 국회의 입법폭주를 막을 방법을 찾아본다.
# 2011년 11월20일 '게임셧다운제'가 시행됐다. 만 16세 미만의 심야(자정~오전 6시) 게임 접속을 강제 차단토록 한 법이다. 청소년 수면권 보장과 게임 중독 방지가 명분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처음부터 한계를 안고 있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주류로 자리잡은 모바일 게임이 적용 대상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실패한 규제라는 비판에 시달린 게임셧다운제는 '신데렐라법'이란 조롱만 남긴 채 2022년 결국 폐지됐다.
국회는 국가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다. 존 로크는 "입법부는 공화국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혼"이라고 했다. 장 자크 루소는 "입법권은 국가의 심장"이란 말을 남겼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국회가 대통령과 정부보다 먼저 나온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회는 일부 의원들이 쏟아내는 설익은 법안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법안의 폭주로 인해 정작 중요한 민생 법안들은 뒷전으로 밀린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지금의 국회는 말 그대로 '법안 찍어내는 공장'이나 다름없다"며 "법안 내용이 뭔지, 부작용은 없는지 제대로 따지지도 않은 채 서로 실적을 올려주려고 (법안 공동발의) 도장만 찍어주다 보니 자신이 공동발의한 법안에 대해 본회의에서 반대표를 던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토로했다.
'양보다 질' 중심의 입법을 위해 국회의원 공천 기준에서 법안 발의 건수를 제외하고, 의원 발의 법안에 대해서도 '입법영향분석'을 의무화하는 방안 등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법안 1건 심사에 고작 13분
국회미래연구원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 의원 1인당 법안 발의 건수는 86.2건에 달했다. 같은 기간 이원집정부제 국가인 프랑스(4.0건)의 약 22배이고 의원내각제 국가인 영국(1.2건) 독일(1.2건) 일본(1.0건)과 비교하면 격차가 약 80배까지 벌어진다. 한국과 같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인 미국은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55.3건으로 우리나라에 크게 못 미친다.통상 의회 다수세력이 내각을 구성하는 '단점정부'(Unified Government) 성격의 의원내각제에선 주로 정부가 법안을 발의하기 때문에 대통령 중심제에 비해 의원 발의 법안이 적다.
우리 국회에서 의원 발의 법안 건수는 14대 국회(1992~1996년) 이후 줄곧 늘어왔다. 14대에서 902건에 그쳤던 의원 발의 법안 수는 21대 2만5858건까지 급증했다.
의원 발의 법안이 폭증하면서 법안 심사 시간은 턱없이 부족해졌다. 국회 상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의 법안 1건당 평균 심사 시간은 17대 국회 당시 23분이었지만 21대 국회에선 13분으로 거의 반토막이 났다.
졸속 입법이 낳은 폐해 가운데 하나가 사회의 사법화다. 저작권법 개정 이후 불거진 기획 고소 논란이 대표적 사례다. 비친고죄 적용 범위를 확대한 탓에 권리를 위임받은 법무법인이 합의금을 노리고 고소를 남발하는 이른바 '합의금 장사'가 크게 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이 '소송 공화국'으로 전락했다는 평가다. 법원의 접수 사건 수는 2020년 667만건을 기록한 이래 2022년까지 3년 연속 600만건을 넘어섰다. 인구가 한국의 약 2.4배인 일본이 같은 기간 330만건대에 머문 것과 대비된다. 고소·고발 건수는 2021년 28만563건(연루 35만7600명)에서 2022년 31만432건(46만3937명), 2023년 33만1281건(48만1231명)으로 불어났다.
시민단체 '줄 세우기' 이후 법안 폭주
한국 국회의원들이 미국 등과 비교할 때 유독 법안을 많이 발의하는 이유는 크게 3가지다.첫째, 법안 발의 건수가 국회의원 공천의 핵심 성과 지표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더불어민주당의 21대 국회의원 평가 시행세칙을 보면 최종 평가는 ▲의정활동(380점) ▲기여활동(250점) ▲공약이행활동(100점) ▲지역활동(270점) 등 4개 분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의정활동 평가지표에는 대표발의 법안 수, 대표발의 법안의 입법 완료 건수 등이 포함된다. 반면 미국에선 과거 선거 득표율, 지역구 예산 확보 성과, 상임위원회 내 영향력 등이 공천의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둘째, 상임위원장의 권한이다. 한국 국회법 제49조 2항에 따르면 상임위원장은 의사 일정을 정할 때 각 교섭단체 간사와 협의해야 한다. 민주적 운영을 위한 장치지만 간사와의 교감이 이뤄질 경우 완성도가 낮은 법안이라도 상임위 심사 테이블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연방의회에선 상임위원장이 법안 심사 여부에 대해 사실상 전권을 갖는다. 위원장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지 않는 법안은 상정조차 되지 않는다. 미국 의원들이 법안 발의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마지막 이유는 시민단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법률소비자연대 등 주요 시민단체들은 국회의원들의 법안 발의 건수를 매년 발표하고 있다. '일하는 국회'를 독려하겠다는 취지지만, 이들이 발표를 시작한 16대 국회 이후 의원 발의 법안 수가 폭증했다(16대 2507건→17대 7489건). 알맹이 없는 자구 수정 법안이나 유사 법안을 쪼개서 발의하는 실적 부풀리기가 관행화된 게 이 시점부터다.
한편 미국 시민단체들은 법안 발의 건수가 아니라 핵심 법안이 상임위와 본회의 문턱을 넘었는지를 가중 평가하는 '입법 유효성 지표'(LES)를 중시한다. 또 주요 쟁점 법안에 대한 찬반 기록을 담은 스코어카드를 공개해 유권자들의 판단을 돕는다.
선진국은 법안 '품질' 관리
국회의 과잉 법안 발의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입법영향분석 제도 도입이 꼽힌다. 입법영향분석은 법안이 시행될 경우 사회·경제적 파급 효과와 부작용을 사전에 예측·검토하는 절차다. 현재 한국은 정부 입법에는 규제영향평가를 적용하고 있지만 전체 법안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의원 발의 법안에는 입법영향분석 의무가 없다. 이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7년 보고서를 통해 "국회 내에 상설 입법·규제 품질 점검체계를 구축하라"며 제도 보완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미국은 법안 심사 단계에서 상임위원회가 작성하는 보고서에 규제 영향을 정밀하게 분석해 기재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 상·하원 법제실, 의회예산국(CBO), 의회조사국(CRS), 회계감사원(GAO) 등 풍부한 입법지원기관들이 방대한 데이터를 제공한다.
유럽연합(EU)의 경우 법안 발의권을 가진 집행위원회(EC)가 초기 단계부터 철저한 영향평가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또 의회조사처(EPRS)는 보고서를 다시 검증하고 심사 과정에서 법안이 수정되면 수정된 내용에 대해서도 추가 영향평가를 수행한다.
영국은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규제정책위원회'(RPC), 독일은 '국가규범통제위원회'(NKR)라는 독립 기구가 법안의 규제 영향을 분석한다. 스위스는 아예 헌법에 입법영향평가를 명시해 모든 법안이 반드시 '효과성' 평가를 거치도록 못 박았다.
일본, 예산 드는 법안은 50명 이상 동의해야 발의
입법영향분석 제도를 도입하려면 분석기관의 정치적 독립성 확보가 전제돼야 한다. 전문가들은 객관적인 분석을 담보하기 위해 국회 입법조사처 등 입법영향분석을 맡을 기관 책임자의 임기를 확실히 보장해야 한다고 제언했다.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입법조사처에 모든 부담을 떠넘길 수는 없다"며 "상임위별 전문위원과 입법지원 인력, 정책·예산·법률 검토를 맡는 지원팀까지 두텁게 뒷받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야 법안을 '빨리, 많이' 내는 구조에서 벗어나 '검토하고, 다듬고, 통과시키는' 구조로 바꿀 수 있다"고 밝혔다.
입법영향분석의 초점이 규제 비용이나 행정 부담처럼 숫자(계량화)로 환산 가능한 항목에만 치우칠 경우 노동·환경·안전·인권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가치는 배제될 수 있다는 우려도 검토할 지점이다.
각 정당의 국회의원 공천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단순한 발의 건수가 아니라 의원이 입법을 주도한 대표 법안의 품질과 사회적 기여도 등을 핵심 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현행 10명인 법안 공동발의 요건을 20명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13대 국회 당시 법안 1건당 평균 73.2명에 달했던 공동발의 의원 수는 20대 국회 들어 12.5명으로 급감했다. 요건만 겨우 채워 발의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뜻이다.
예산을 수반하는 법안을 발의할 때 50명 이상의 동의를 요구하는 일본 의회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이 밖에 입법 총량을 관리하는 '입법총량제' 도입 등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천하람 개혁신당 원내대표는 "한국의 입법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얘기를 여러 자리에서 듣는다"며 "매 국회마다 수만 건의 법안이 발의되고 끝날 때는 또 수만 건이 폐기되는데, '일하는 국회'라고 자랑하지만 사실 자랑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헌법 개정이 필요한 사항이겠지만, 제 마음 같아서는 입법총량제를 도입해 의원이 낼 수 있는 법안 숫자에 제한을 두고 싶다"며 "그래야 정말 꼭 필요한 것, 심사숙고한 것만 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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