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출장 중 심근경색으로 위중한 상태에 빠졌던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베트남 호찌민에서 향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024년 4월 8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에서 발언을 하는 모습. /사진=뉴스1


국무총리와 민주당 대표 등을 지낸 이해찬 전 총리가 25일 별세했다. 향년 74세

이 전 총리는 지난 23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베트남 출장 중 출국 직전 공항에서 의식을 잃었다. 당초 지난 22일부터 26일까지 일정으로 베트남 출장을 계획했지만 호치민행 비행기에서 거동이 힘들 정도로 건강 상태가 악화됐다.


심정지를 겪고 호흡이 돌아오기도 했으나 끝내 25일 베트남 현지 병원에서 별세했다. 청와대는 조정식 정무특보를 24일 베트남 현지로 급파해 이 전 총리 가족들과 국내 이송 방안 등을 논의했다.

이 총리는 재야 운동권 1세대로 1988년 정계에 입문했다. 탁월한 정책·기획 능력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두 차례나 민주당 대표를 역임했다.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을 맡는 등 민주 진영의 핵심 전략가·조정자 역할을 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인연도 깊어 현 정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선임됐다. 2021년 대선 당시 이재명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맡는 등 비주류 정치인 이재명이 대권주자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정치 조언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2년 7월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하던 1972년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 운동을 시작했다.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두 번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반독재·통일운동을 하면서 1985년 대학 졸업 시기까지 14년 동안 학생 운동을 이끌며 공안 당국의 수배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1988년 제도권 정치에 입문한 뒤 민주당의 전신으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화민주당에 입당해 그해 12월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당선됐다.


17대 총선까지 같은 지역에서 내리 다섯 차례 당선됐다. 19·20대 총선에서는 지역구를 세종시로 옮겨 두 차례 더 당선되는 등 모두 7선 의원을 지냈고 그가 의원이 된 직후부터 대학 후배였던 유시민씨가 보좌관으로 일했다.

이 전 총리는 1995년 민선 1기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역임했고 1998년부터 김대중 정부의 초대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이 전 총리는 체벌·야간자율학습을 폐지하는 등 교육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교원정년 단축에 대한 교원들의 반발 속에 1년2개월 만에 물러났다.

이 전 총리는 친노무현계 좌장으로 불릴 정도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도 깊다. 초선 국회의원 시절 노무현·이상수 의원과 노동위 3총사로 불렸고 2002년 대선에서 선거기획단장을 맡아 노무현 대통령 집권에 기여했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을 이끌었고 노 전 대통령이 탄핵 정국에서 복귀한 뒤 2004년 고건 전 총리에 이어 2기 국무총리로 임명돼 실세 총리로 국정 전반을 이끌었다. 당시 총리 재직 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추진사업을 마무리했고 대정부 질문에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의원들과 충돌하며 '버럭해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9년 노 전 대통령 서거 후에는 노무현 재단을 출범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