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7주년] 은행 격전지서 '의미 있는' 도전

흡사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금융선진국 싱가포르는 분명 비옥한 금융영토지만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선 수많은 도전과제를 넘어야 한다.

'래플스 플레이스'(Raffles Place).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인 스템포드 래플스의 이름이 싱가포르의 금융 중심가에 붙는다. 싱가포르의 가장 고귀한 브랜드를 가리키는 '래플스'는 그만큼 이곳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신한은행, 외환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 등 국내은행들도 이곳에 싱가포르지점을 내고 격전을 치르고 있다.

<머니위크>는 세계금융의 축소판인 래플스 플레이스에서 더디지만 한발 한발 금융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국내 시중은행 지점장 4인을 만나 궁극적인 현지화와 글로벌 금융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봤다.



"싱가포르는 교역중심지, 규모 뛰어넘는 의미"
/ 조영식 신한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조영식 신한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사진=머니위크DB
조영식 신한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사진=머니위크DB

신한은행은 1977년 사무소를 열면서 싱가포르에 진출, 90년 지점 승격에 성공했다. 그후로도 20여년이 흘렀지만 현재 지점은 직원 14명이 근무하는 아담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업무범위도 제한적이다. 싱가포르에선 현지은행(Local Bank)과 외국계은행(Foreign Bank)의 업무와 영업범위를 명확히 구분한다. 따라서 국내은행들의 싱가포르지점에선 개인고객의 방문이나 자동화기기 등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기업금융에 주력한다.

그러나 조 지점장은 단순히 회사규모나 영업이익으로 싱가포르 진출의 의미를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싱가포르 금융의 화려한 이미지만 떠올린다면 국내은행의 성장속도나 업무범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며 "그러나 싱가포르는 교역의 중심지로 금융기관이 가장 먼저 진출해야 하는 요충지"라고 설명했다.

활발한 교역에 따라 기업이 가면 금융도 따라가는 것이 당연지사. 싱가포르 진출 기업에 저리의 자금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국내 본점의 기업고객부 및 무역협회 등과 연계해 기업이 싱가포르 진출 시 알아야 할 법률 등의 상담기관을 이어주는 '가교'역할도 수행한다.

조 지점장은 "현지화라는 용어는 사실 20~30년 전부터 외쳐온 구호지만 여전히 가깝지 않은 현실"이라고 지적한 뒤 "신한은행 임직원은 무료급식이나 거리청소 등 자원봉사에도 참여하고 한인회나 현지인 채용을 통해서도 한발 한발 '신한'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금융위기는 곧 국가의 위기, 국가차원서 금융 강화"
/ 박용만 우리은행 싱가포르지점장
 
 
박용만 우리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사진=머니위크DB
박용만 우리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사진=머니위크DB

우리은행 싱가포르지점의 직원 20명 중 한국인은 지점장을 포함한 단 3명이다. 박용만 지점장은 "과거에는 현지에서 직원을 채용하면 이동이 잦아 꺼려했지만 앞으로는 가능하면 현지직원을 뽑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한국계 거래를 늘리기 위해서다.

우리은행은 1980년 싱가포르에 지점을 열었다. 당시는 싱가포르에 진출하는 한국기업에 대한 금융 제공이 주목적이었지만 지금은 한국기업만 바라봐선 생존이 어려운 시대가 됐다.

박 지점장은 "얼마 전 우리나라 기업이 싱가포르에서 3억달러(한화 3205억원) 규모의 대형 사업을 따냈는데 싱가포르 현지은행이 '상상할 수 없는' 금리를 제시해 거래를 맺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기업에 공을 들이는 싱가포르 현지은행 및 글로벌은행이 늘면서 '한국기업=국내은행 전담고객'이란 등식이 깨졌다고 전했다. 싱가포르 현지은행을 비롯해 글로벌 금융사들이 한국 데스크까지 두며 밀착 마케팅을 펴는 상황에서 안이한 애국심 마케팅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은행도 거래처를 다변화해 금융수요가 많은 중국 등의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박 지점장은 "비한국계를 대상으로 거래를 넓히는 것이 쉬운 길은 아니지만 이는 한국 금융회사의 우수성을 알리는 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금융회사 직원들이 금융지식이 풍부하고 업무의 처리속도도 단연 빠르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이미 글로벌 위기에서 경험했듯 금융위기는 곧 국가의 위기로 연결되는 시대"라며 금융경쟁력 강화에 국가 전체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선진 금융기법은 기본에 충실한 관리가 밑바탕"
/ 강윤철 외환은행 싱가포르지점장
 
 
강윤철 외환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사진=머니위크DB
강윤철 외환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사진=머니위크DB


"싱가포르는 제조업 기반이 약하고 무역이 활성화된 국가다. 제조업 대출의 경우 한건이 성사되면 설립 초기뿐 아니라 공장 가동과정에서 운전자금 등이 지속적으로 필요하지만 무역금융은 한건이 발생해도 그때뿐이다."

강 지점장은 싱가포르에서의 현지거래는 매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외환은행 싱가포르지점은 1973년 설립돼 현지 진출한 국내은행 중 이 땅에서의 '개척'의 역사가 앞선다. 국내은행 중 유일하게 개인고객 거래가 가능한 은행 라이선스를 보유했다. 싱가포르달러표시예금에 대한 거래에서 다른 국내은행보다 우위를 점하지만 전방위 영업이 가능한 현지은행과는 경쟁이 여의치 않다.

그럼에도 오랜 네트워크와 경험을 바탕으로 점진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 2012년 896만달러(한화 95억2700억원) 수준이던 업무이익은 지난해 953만달러(한화 101억원)로 뛰었고, 올해는 상반기에 이미 500만달러(한화 53억원)를 넘어서는 업무이익을 거뒀다. 강 지점장은 "올해 업무이익 1000만달러(한화 106억원)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강 지점장이 내세우는 선진금융시장에서의 강력한 금융기법은 바로 '기본에 충실한 것'이다. 강 지점장은 "흔히 기업에 대출해줄 때까지는 신중하지만 이후 관리는 소홀하기 쉽다"며 "대출기업의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수시로 관리하고 부정적인 징후가 있으면 조기에 회수하는 게 선진기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현재 외환은행의 대출거래 중 한국계 기업에 대한 대출이 40%, 외국계 기업에 대한 대출이 60% 수준이다. 외환은행은 앞으로 싱가포르 내에서 점차 비중이 커지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기업금융(IB)시장에 적극 참여하고 신디케이트론시장에도 진출해 외국계 비중을 더 늘릴 계획이다.



"장기적 안목으로 현지기업 심사시스템 구축"
/ 이동규 하나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이동규 하나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사진=머니위크DB
이동규 하나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사진=머니위크DB


"한국에 있는 국내은행이 글로벌화해야 한다면 현지진출 은행은 현지화해야 한다." 이동규 지점장은 금융선진화의 방향을 이렇게 제시했다. 현재는 석유와 관련된 한국계 기업이 하나은행 싱가포르지점의 주 고객이지만 앞으로 현지기업과의 거래비중을 높일 계획이다.

이 지점장은 "싱가포르는 현지시장만을 바라보면 매우 작지만 동남아시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며 "동남아 거점으로써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의 금융수요도 지원한다"고 전했다.

싱가포르 현지기업들은 싱가포르달러로 거래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지점장은 "미국달러로 거래되는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로 다른 지역을 공략하는 것이 효과적이기에 현지기업의 대출 등을 심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나가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싱가포르 현지진출 지점뿐 아니라 국내은행 본사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다. 국내은행들이 글로벌은행으로 성장하려면 전체 대출 중 해외자산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 이 지점장은 "국내 시중은행들의 대출 가운데 90% 이상이 국내 대출로 채워지는 실정인데 해외자산을 늘리기 위해선 관련 인프라 구축이 절실하다"며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글로벌 심사 및 지원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5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