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디자이너라는 꿈을 ‘감히’ 꿨던 것일까. A씨는 자책했다. 지난 2010년 한 유명 디자이너실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시간은 A씨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인턴이었지만 원단 픽업, 피팅, 디자인, 청소, 판매, 비서 등 모든 일을 직원만큼 능숙하게 처리해야 했다. 업무량이 많은 날에는 퇴근이 불가능했다. 택시를 타는 일이 잦았다. 물론 택시비도 모두 A씨의 부담이었다. 교통비와 식비 등을 감안하면 무급으로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상사들은 그의 외모를 비하하고 부모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래도 A씨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위로랍시고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미웠다. 회사가 휘두른 펀치는 A씨가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다.

# B씨는 지난해 국제시사지로 알려진 한 월간지의 사원이 됐다. 6개월간 수습기간을 거쳐야 했지만 B씨는 기뻤다. 대학시절 꾸준히 구독할 정도로 좋아했던 월간지였기에 B씨는 긴 수습기간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발행인도 명문대 출신의 B씨를 반겼다. 그는 B씨에게 훌륭한 편집자로 키워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달이 지나자 발행인은 B씨에게 월간지와 출간한 책을 팔라고 했다. 편집자로 들어온 B씨는 편집이 아닌 독자관리와 영업실적 압박에 시달렸다. 6개월이 지나자 발행인은 B씨의 수습기간을 1년으로 연장한다고 말했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B씨의 업무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그의 책 판매율이 저조했기 때문이다. 화가 난 B씨는 결국 그곳을 박차고 나왔다. B씨가 나간 후 월간지는 또다시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 편집자를 채용했다. B씨는 곧바로 감을 잡았다. 이 월간지는 처음부터 정규직을 채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B씨는 글을 읽는 게 싫어졌다. 어떤 글도 가식이고 거짓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6개월이라는 애매한 경력으로는 갈 곳이 없었다.

화려해 보이는 패션업계와 시대의 양심을 자처하는 출판업계의 어두운 이면이다. 사회생활 밑천이 없는 청년들을 업체가 철저하게 이용한 사례다. 실제 많은 기업이 인턴제도와 수습기간을 이용해 고급인력을 싼값에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열정도 ‘을’인 시대, 채용도 ‘갑질’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청년유니온, 패션노조 등이 주최한 ‘청년착취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청년 유니온과 패션노조는 청년 노동을 착취하는 디자이너 1위로 뽑힌 이상봉 디자이너에게 ‘2014 청년착취대상’을 수여했다.

청년유니온에 따르면 이상봉 디자이너실에서 일한 견습생은 한달에 10만원, 인턴은 30만원을 받으며 일했다. 수당도 없이 야근과 휴일근무를 수시로 반복하고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였다. 인턴이라는 명찰 하나만 달아주고 ‘열정페이’를 강요한 것이다.

이런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에는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하던 20대 비정규직 근로자가 휴일근로, 쪼개기 계약, 성추행 등을 견디다 정규직 전환에 탈락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열정페이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열정페이는 기업이 인턴제 또는 수습기간을 이용해 급여를 적게 지급하고도 청년들의 열정을 강조하면서 일을 시키는 데 유용한 수법으로 자리 잡았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공공기관에서 뽑은 청년인턴 8000여명 중 정규직 채용을 전제로 한 인턴은 1815명(23%)에 불과했다. 대한지적공사는 인턴의 정규직 전환율이 8%에 그쳤다.

민간기업도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율이 50%에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 2012년부터 인턴제도를 운영하는 375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인턴의 정규직 전환율은 47.7%였다.

또한 기업의 절반 이상이 사원을 정식 채용하기 전 수습기간을 두는 것으로 조사됐다. 취업포털 사람인에 따르면 기업 10곳 중 6곳은 사원 채용과정에서 수습 등 유예기간을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턴·수습제도, 악용하는 기업들

인턴과 수습의 개념 차이는 이렇다. 우선 인턴은 그 사람의 능력과 적성을 가늠한 다음 채용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다. 따라서 기업은 인턴사원을 반드시 정규직으로 채용할 의무가 없다. 인턴은 정식 근로계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인턴기간 동안 근로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아 최저임금, 4대보험 등 최소한의 법적 보호는 받을 수 있다.

수습은 근로자가 업무에 적응할 때까지 훈련하는 기간을 두는 제도다. 인턴과 달리 수습사원은 정식으로 회사와 근로계약을 맺는다. 따라서 회사가 마음대로 수습사원을 해고할 수 없다. 수습기간은 통상 3개월이다. 인턴에 비해 상당히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회사가 수습사원의 업무능력을 미숙하다고 판단할 경우 그 기간은 늘어난다.

문제는 일부 기업이 수습기간의 유연성을 악용한다는 점이다. 업무를 충분히 숙지했음에도 수습기간을 늘리면 회사는 능숙한 인력을 싸고 길게 쓸 수 있다. 이때 회사는 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인턴과 수습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명확한 기준이 없어 직무교육이 현실적으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노무법인 대명의 한 노무사는 “인턴 및 수습제도를 악용하더라도 이를 규제할 만한 법적 제도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며 “따라서 (청년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고 인턴제와 수습기간을 악용하는 기업이 상당히 많다”고 전했다.

인턴이나 수습사원 당사자가 임금을 적게 받겠다고 회사와 합의하더라도 사업주는 최저임금을 보장해야 한다. 만약 최저임금보다 적은 급여를 줬다면 노동법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한 외국계 기업의 인사담당자는 “우리 회사도 인턴제도가 있고 신입직원을 뽑으면 수습기간을 둔다”며 “명분은 업무능력 검증이지만 솔직히 인턴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확률은 10%도 되지 않고 경력자에게 수습기간을 두는 것은 조금이라도 급여를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처럼 현실은 드라마보다 잔인하다.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그래도 행운아였다. 자신을 끌어주는 상사를 만나 계약기간 2년이나마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현실의 청년취업자들은 인턴제와 수습기간을 악용하는 일부 회사에 의해 1년도 안 되는 경력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고 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6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