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과 저축은행이 중금리 대출시장을 놓고 기 싸움에 들어갔다. 신용등급 4~7등급인 중신용자 고객층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모습이다. 시중은행은 모바일뱅크를 통해 대출문턱을 낮추는 데 열을 올리고 저축은행은 대출한도를 높이는 전략으로 신규고객을 유혹한다.

실적을 보면 당연히 시중은행이 크게 앞선다. 금리가 낮고 은행의 규모, 신뢰·인지도 부문에서 시중은행이 훨씬 유리하다. 시장 전망도 시중은행에 더 긍정적이다. 시중은행의 중금리 대출규모는 올해 1000억~2000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저축은행의 중금리 대출시장규모는 300억~400억원에 그칠 전망이다. 그나마 중금리 대출시장을 선도한 SBI저축은행의 ‘사이다’가 판매 실적 200억원(4일 기준)을 돌파하면서 저축은행 중금리대출 점유율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사진=뉴시스 최동준 기자
/사진=뉴시스 최동준 기자

이처럼 중금리 대출시장에서 우위를 점하지만 시중은행의 표정은 밝지 않다. 오히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반면 저축은행은 시중은행과의 경쟁을 반기는 모습이다. 시중은행과 저축은행이 실적과 무관하게 상반된 표정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시중은행, 중신용자 유입 부담

시중은행들은 중신용자 고객층이 유입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상황이다. 대출신청자의 신용도를 파악하기 힘들 뿐 아니라 건전성이 떨어질 수 있어서다. 지난해 5월 중금리대출을 첫 출시한 우리은행의 모바일뱅크(위비뱅크) 연체율은 2.6%대다. 이 중 신용등급 6~7등급 저신용자 연체율은 4%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이 0%대 수준인 것과 비교하면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수치다.


은행의 경우 부실률이 증가하면 대손충당금 부담으로 이어진다. 모바일뱅크 대출규모가 늘어날수록 부실률도 높아질 가능성이 커 중신용자 고객층이 ‘뜨거운 감자’로 인식되는 게 사실이다.

저축은행과 경쟁구도가 형성되는 것도 부담이다.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 우리은행, KEB하나은행 등 국내 시중은행의 자산은 은행별로 300조원이 넘는다. 반면 저축은행업계 1위인 SBI저축은행의 총자산은 3조8000억원에 불과하다.


저축은행업계로선 시중은행과 경쟁구도 흐름을 이어가면 신뢰성과 인지도 부문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반면 시중은행 입장에서는 오히려 신뢰도가 떨어지는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시중은행이 저축은행의 밥그릇을 빼앗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불거질 수 있는 대목이다.

시중은행들은 중금리 대출실적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실적을 공개하면 계속해서 저축은행과 비교될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에서다. 아예 저축은행과의 경쟁구도에 불만을 터뜨리는 은행도 있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시중은행과 저축은행의 중금리대출은 금리체계부터 다르다”며 “시중은행은 연 10% 미만, 저축은행은 연 10%대 수준에서 신용대출을 지원한다. 경쟁구도가 될 수 없는 구조”라고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고객에게 적용되는 금리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데도 금융권에선 이를 ‘중금리대출’이라는 단어로 통합해 사용한다. 마치 은행과 저축은행이 경쟁하는 것처럼 비춰져 부담스럽다”고 덧붙였다.

반면 저축은행의 의견은 다르다. 저축은행의 주요 고객층은 신용등급 4~7등급인 중신용자가 대부분이다. 저축은행 관계자는 “시중은행은 그동안 우량고객을 대상으로 영업했는데 지금은 중신용자 금융소비자까지 흡수하고 있다”며 “대출고객층이 부딪히는 것은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저축은행 고객 중 시중은행 모바일대출로 갈아타는 고객도 눈에 띈다”며 “앞으로 은행과 저축은행 간 중금리대출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울며 겨자 먹는 시중은행들

시중은행이 중금리 대출시장에 진출한 것은 금융당국의 눈치 때문이다. 시중은행은 그동안 신용등급 1~3등급 이내 우량고객을 대상으로 대출을 지원했다. 물론 4~7등급 고객도 있지만 극히 일부에 한해서만 허용했다.

하지만 금융당국이 최근 보증보험과 연계한 중금리 대출시장 활성화 방안을 내놓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 방안은 은행이 중신용자에게 신용대출을 진행했는데 대출금을 떼일 경우 서울보증보험이 은행에 대출금을 갚아주는 내용을 담았다. 대신 은행은 서울보증보험에 4%대의 보험료를 별도 지급해야 한다.

서울보증보험이 부실 리스크를 보증한다 해도 굳이 저축은행의 파이까지 빼앗고 싶지 않다는 게 시중은행의 속내다. 시장논리에 따라 경쟁이 치열해지면 시중은행도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는데 금융당국이 강제로 나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와 관련 시중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은행과 저축은행, 대부업 간 영역이 나눠져 있는데 굳이 시중은행에 저축은행 파이까지 건드리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시장논리를 역행한 금융관치”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이에 반박하는 목소리도 있다. 처음부터 시중은행이 중신용자를 껴안았다면 굳이 금융당국이 나서지 않았을 것이란 주장이다. 정부가 개입한 것은 어떻게 보면 은행들이 역할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고객들은 중금리 대출시장이 확대되는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자부담이 줄고 모바일로 빠르고 편리하게 은행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 간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자산규모와 상관없는 경쟁구도가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시장환경에 따라 저축은행이 시중은행을 넘어서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고 예고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2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