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공=금융감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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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보험금을 둘러싼 논쟁이 또다시 가열되고 있다. 금융감독원과 생명보험업계가 자살보험금 지급을 놓고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최근 금감원이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도 지급해야 한다고 압박하자 생보업계는 대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날로 뜨거워지는 자살보험금 쟁점을 짚어보고 유가족들이 현실적으로 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지 알아봤다.

◆당국 "소멸시효 지나도 지급해라" vs 생보사 "아직 줄 이유 없어"

지난 23일 금융감독원이 소멸시효 상관없이 약속한 자살 관련 보험금을 모두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금감원에 따르면 자살관련 미지급 보험금은 올해 2월 기준 2465억원(2980건)에 이른다. 여기에 추가 청구될 보험금과 보험금 지연 이자까지 합산하면 보험사들이 지급해야 할 자살 관련 보험금은 1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보험사들이 소멸시효 주장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이날 권순찬 금감원 부원장보는 "대법원 첫 판결이 나올 때까지 보험사가 지급해야 할 자살보험 관련 계약의 80% 이상이 소멸시효기간이 이미 지났다"며 "소멸시효제도에 따른 민사적 판단을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미루는 것은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고 질타했다.

당국의 강경한 태도에 생보사들은 적잖이 놀란 눈치다. 코너에 몰린 보험사들은 '자살보험금 지급이 자살을 조장할 수 있다'는 해묵은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또 대법원 판결 없이 자살보험금을 지급할 경우 '배임' 문제에 연루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보험사들은 소멸시효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점을 내세워 최종확정 판결이 날 때까지 지급 여부를 보류할 태세다.


당사자인 보험사들은 여론의 눈치를 보면서도 소멸시효가 지난 건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이다. 생보사 한 관계자는 "판결이 난 미지급금에 대해서는 보험금을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며 "다만 소멸시효와 관련한 대법원 판례가 없어 아직 보험금을 지급할 수 있을지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생보사 관계자는 "소멸시효가 지난 건에 대해 보험금을 지급하더라도 대법원이 다른 판결을 내놓으면 경영진은 배임 혐의로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8건의 소멸시효 관련 소송이 법원에 계류 중이다. 대부분 1심과 2심에서 보험금 청구시효인 2년이 지난 계약에 대해서는 자살보험금을 줄 필요가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여론의 무게는 금융당국 쪽으로

하지만 여론은 보험사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모양새다.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국장은 "애초부터 자살보험금 사태의 본질은 소멸시효 완성 여부나 자살이 재해냐 아니냐가 아니다"며 "약관은 소비자와의 약속인데 보험사들은 자신들이 불리해지자 스스로 작성한 약관을 이제 와서 부정하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약관 내용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작성자불이익의 원칙'도 보험사가 모를 리 없다"며 "자살보험금 문제의 본질은 약관 작성자가 약관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지 여부"라고 강조했다.


금감원은 대법원에서 소멸시효 2년이 지난 보험금은 돌려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더라도 기존 입장을 고수한다는 방침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보험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보험사에 대해서는 제재 및 시정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소멸시효가 지난 휴면보험금을 보험계약자에게 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살보험금도 모두 돌려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휴면보험금 지급사례와 연결지어 배임은 보험금 미지급 사유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

또 민사적인 판단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대법원에서 소멸시효 완성 여부를 판단할 때까지 또 기다리면 미지급 계약건이 더 늘어날 것이란 판단에서다. 지난 2014년에도 금감원이 ING생명에 대한 제재 후 생보사에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권고했지만 당시 보험사들은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보험금을 지급을 미뤘다. 이 기간 동안 소멸시효가 지난 계약 건은 1602건으로 전체 미지급 계약건의 53%, 소멸시효가 지난 계약건의 80%에 달했다. 

◆유가족 보험금 받을 수 있나… "2~3년 걸릴 듯"

관건은 유가족들이 현실적으로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느냐다. 법조계는 2010년 4월 이전에 판매된 재해사망보험금 특약상품에 가입한 보험계약자들의 경우 보험금을 청구하면 받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보험사들이 자살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소송전을 이어가며 2~3년가량을 끌 것으로 예상한다.


실제 최근 5년간 생명보험사들은 소비자가 공동으로 자살보험금 청구소송을 낸 건에 대해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며 시간을 끈 것으로 파악됐다. 법무법인 한 관계자는 "보험업계 전반적으로 이런 사례가 파다하다"며 "최근까지도 생명보험사들이 자살보험금에 대한 '채무부존재' 소송을 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보험사가 소송전을 벌이는 것은 시간을 벌어 지급액을 줄이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사실 개인 가입자가 시간을 써가며 거액의 변호사 수임료까지 지출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대법에서 소멸시효가 지난 건에 대해서도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하더라도 가입자가 직접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는 이상 보험사가 알아서 지급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청구를 하더라도 여러 이유를 들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려 할 것으로 예상돼 가입자는 오랜 기간의 소송을 예상해야 한다"고 내다봤다.

이어 "금융당국의 권고는 법적효력이 없어 보험금 청구권 소멸기간 2년을 넘기지 않은 가입자의 경우만 소송으로 시효를 중단시켜 시간을 벌 수 있다"며 "이들 가입자마저 시효를 중단시키지 못하고 2년을 넘기면 현재로서는 보험사가 고의로 보험금을 주지 않더라도 법적으로 문제 삼기가 힘들어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