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이 위태롭다. 국내 1위 해운사가 바람 앞 촛불처럼 크게 흔들려 채권단 결정에 따라 명운이 다할 위기에 처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09년부터 8년째 이어진 해운업 불황으로 우리나라 양대 해운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생존의 시험대에 올랐다. 구조조정이 본격화할 당시 흑자를 내던 한진해운은 현대상선보다 상황이 나은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현대증권 매각과 대주주의 사재출연 등 적극적 지원이 이뤄진 현대상선과 달리 한진해운은 끝내 유동성 부족에 발목을 잡혔다.


/사진=뉴시스 임태훈 기자
/사진=뉴시스 임태훈 기자

◆ 조양호 회장, 한진해운 포기했나

채권단이 한진해운의 추가 자구안 마감시한으로 최후통첩한 지난 8월25일 재계의 이목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 집중됐다. 이날 오후 3시쯤 제출 예정이던 한진해운의 자구안은 오후 5시가 돼서도 넘어오지 않았다. 한진그룹 측은 막판까지 자구안의 범위와 문구를 놓고 고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진해운의 명운을 손에 쥔 금융당국과 채권단은 앞서 수차례 ‘원칙’을 강조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과 이동걸 산업은행장은 한진해운의 향방을 묻는 질문에 ‘추가 자금지원은 없다’는 원칙만을 되풀이했다. 한진그룹과 조 회장 측에서 운영자금 전액을 지원해야 자율협약 연장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내년 말까지 자율협약을 체결한다고 가정했을 때 채권단은 한진해운에 최소 7000억원의 운영자금이 필요한 것으로 추산했다. 이마저도 충분조건은 아니다. 7000억원은 용선료를 30% 조정하고 선박금융 상환 등 채무조정이 원활하게 이뤄졌을 경우를 가정한 금액이다. 한진해운이 올 2분기에도 2289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가운데 최악의 경우 1조3000억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이날 한진그룹이 내놓은 한진해운 지원방안은 이런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채권단과 한진그룹 등에 따르면 이번 자구안에는 당초 약속했던 대한항공을 통한 약 4000억원의 유상증자와 미국 롱비치터미널 매출채권 유동화, 용선료 조정 등의 내용이 담겼다.


조 회장의 사재출연은 직접 명시되지 않았으나 대주주 고통 분담과 관련해 한진 측은 필요시 한진해운 대주주인 대한항공 보유 지분(33.23%)에 대한 감자를 수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채권단 추가 자금 투입이 불가피할 경우 한진그룹 주축인 대한항공을 매개로 한 조 회장 일가의 한진해운 경영권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같은 자구안이 공개되자 업계 일각에서는 조 회장이 사실상 한진해운을 포기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현대상선의 전례를 봤을 때 7000억원 이상의 지원안을 마련해 자율협약을 연장하더라도 경영권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


다만 조 회장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조 회장은  2014년 한진해운 경영권을 최은영 전 회장으로부터 넘겨받았다. 이후 현재까지 1조원 넘게 자금을 수혈했고 이로 인해 대주주인 대한항공이 한진해운의 부실을 떠안으며 올 6월 말 부채비율이 1000%를 넘어서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무리한 추가지원은 모기업인 대한항공과 한진칼을 수렁으로 빠뜨릴 수 있는 데다 주주에 대한 배임 등 법적책임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재계 한 관계자는 “조 회장은 꺼낼 수 있는 최선의 카드를 꺼내놓고 채권단의 선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공은 채권단으로… 법정관리 가나

한진해운이 제출한 자구안 규모가 채권단의 요구에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한진해운의 명운을 쥔 채권단의 고민도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채권단이 이번 자구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진해운은 법정관리 수순을 밟게 된다.

채권단은 지난 8월26일 채권단 회의를 열어 자구안 수용 여부를 논의했다. 현재 자율협약에 참여 중인 산업은행과 KEB하나은행, KB국민은행, NH농협은행, 우리은행, 부산은행 등 6곳은 9월4일 이전에 한진해운 자율협약 연장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채권단이 자구안을 승인하지 않으면 한진해운은 법정관리 신청이 불가피하다.

‘원칙’을 강조하며 한진그룹의 자체적 자금조달을 요구해온 채권단이기에 추가자금지원이 필요한 자구안을 승인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현대상선과의 형평성을 고려할 때 신규자금을 지원할 경우 부정적 여론이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국내 최대 해운사를 법정관리에 보내야 한다는 부담 앞에 원칙이 흔들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해운업의 특성상 법정관리에 들어가 회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에서 채권단 내부에서도 우려가 나온다.

해운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채무가 동결되며 국내외 주채무자들은 자국항만에서 유치권을 행사하고 선박을 압류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해운업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화주들은 정상적 운항이 불가능한 해운업체와 운송계약 해지에 나설 것이고 해운사는 결국 파산수순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될 경우 가장 큰 손실을 입는 곳은 다름 아닌 채권은행들이다.

해운업계에서도 법정관리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거세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가 시장에서 퇴출당하면 국내 수출입 화주들이 매년 수천억원의 운송비를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등 '해운 대란'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운업과 필수불가결한 조선·항만을 비롯한 연관산업 및 하청업체에까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각에서는 현대상선과의 합병 가능성을 거론하지만 앞서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정상화 마무리를 전제로 합병이 유리한지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전망이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5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