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콜의 득실] 왜 대한민국은 '호갱'인가
박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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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옥시, 이케아, 코웨이. 국내 시장에서 활발한 영업을 하던 거대기업들이 최근 대규모 리콜을 실시했다. <머니S>는 글로벌시대에 점차 중요성이 커지는 리콜을 다각도에서 조명했다.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 리콜에 성공하거나 실패한 사례를 되짚었다. 리콜에 대한 인식과 제도의 국가간 차이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소비자 중심 '깐깐한 기준' 세워라
글로벌기업들이 국내 소비자를 차별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해외에선 리콜을 결정하고 보상책까지 내놨지만 우리나라는 잠잠한 경우가 많아서다. 국내 소비자 입장에선 분통터지는 일이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가 뭘까.
결론부터 말하면 기업들이 나라마다 태도가 다른 건 생산자가 제조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기준이 다르고 소비자의 목소리 크기가 다른 탓이다. 리콜은 제품을 만든 업체가 결함 등을 인정하고 이를 바로잡는 행위다. 그리고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큰돈’이 들어가는 리콜을 최대한 조용하고 빠르게 처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리콜에 엄격한 나라는 미국이다. 레몬법, 징벌적 손해배상, 집단소송처럼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제도가 소비자의 권익을 대변한다. 따라서 글로벌기업들은 미국에서 리콜문제가 불거지는 걸 ‘굉장히’ 꺼려하고, 혹시라도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으면 미리 자세를 낮춰 용서를 구한다.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일이다.
리콜에 남달리 부정적인 국내 소비자들의 인식도 그간 국내기업들로 하여금 리콜에 소극적이게 만들었다. 제조사가 인정하는 리콜이라는 용어를 자산 가치의 하락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였고, 기업은 문제가 드러나지 않으면 조용히 넘어가거나 문제가 생겨도 리콜(결함시정)이라는 말 대신 ‘수리’라는 순화된 용어를 선호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인식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바뀌는 추세다. 최근 들어 ‘차별논란’이 불거진 것도 이런 인식변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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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
◆국내기준이 허술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리콜 차별논란을 빚은 대표 사례는 폭스바겐과 이케아다. 폭스바겐은 배출가스 조작 논란에 대해 북미에서만 리콜과 함께 소비자 보상책을 마련했을 뿐 우리나라와 유럽에선 사용된 부품이 북미제품과 다르다는 점을 내세워 리콜을 거부했다. 부품교체 없이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국내소비자 수천명은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이케아 ‘말름’ 서랍장은 미국에서 어린이 6명의 사망사고를 일으켜 리콜 결정이 이뤄졌음에도 우리나라에선 정부기준을 충족하기 때문에 리콜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여 공분을 샀다. 결국 한국소비자원이 리콜을 권고했고 국가기술표준연구원의 명령으로 국내업체와 함께 리콜을 발표했다.
당시 이케아가 주장한 건 한국산업표준(KS)이다. 이케아는 말름 서랍장이 9㎏을 버텨 우리나라 규격을 충족한 데다 벽 고정용 장치를 제공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폈다. 같은 서랍장이라도 미국에선 5세 어린이의 평균 몸무게인 23㎏을 버텨야 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9㎏이면 된다는 점을 파고든 것이다.
하지만 업계에선 한국산업표준은 ‘제품개발’의 기준일 뿐 ‘안전’을 보증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산업표준의 목적은 제품과 산업활동을 표준화해 생산효율을 높이고 관련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는 데 있다. 말 그대로 ‘잣대’의 역할이다.
업계 일부에선 오래전에 정해진 산업표준을 새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우리나라의 산업발전수준도 기준설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면서 “예전엔 제조기준이 올라가면 기업이 이를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제는 제조기준을 높일 시점이 됐다”고 전했다.
이에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정부가 여러 규제를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안전에 대한 규제는 소비자지향적으로 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경쟁 치열하면 소비자는 웃는다
여전히 제조사와 정부 중심인 리콜 제도를 소비자 중심으로 바꾸는 문제도 시급하다.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 사태 등에서 볼 수 있듯 정부의 과징금만 발표됐고, 정작 피해를 입은 소비자에 대한 보상은 언급되지 않았다. 게다가 리콜로 인한 소비자 피해를 구제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이와 관련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업체의 늑장리콜로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다면 정부가 보상을 명령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일반적인 단순리콜에 대한 보상기준은 없다”고 전했다. 그는 “연비문제처럼 차를 뜯어서 해결하기 어려운 건 평균수명과 연비차이 등을 계산해 보상안을 명령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글로벌기업들은 미국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두려워한다.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인 행위라는 단서가 붙지만 소비자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실제 손해액 외에 징벌적 성격의 배상액을 부과하는 제도다. 최근 글로벌기업들이 국내시장을 차별하는 움직임이 이어지자 이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국내 완성차업체 관계자는 “미국은 철저히 소비자 중심의 시장”이라며 “소비자의 마음을 얻기가 굉장히 어려워서 혹여 마음이 돌아서면 이를 되돌리는 게 매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게다가 미운털이라도 박히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용을 써야 하는 수가 있어 업체들에겐 여간 까다로운 시장이 아닐 수 없다”고 전했다.
북미시장에 진출한 IT업체의 한 관계자도 “북미시장에 진출하고 안착하려면 소비자 특성파악이 급선무”라며 “기술력에 자신이 있다면 반드시 도전할 가치가 있는 시장”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쉽지 않은 환경임에도 글로벌업체들이 공을 들이는 이유는 소비자 특성과 시장의 구매력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익숙한 제품, 합리적 제품을 선호한다. 절대강자도 절대약자도 없는 독특한 시장이다. 반대로 소비자 신뢰를 얻느냐 잃느냐에 따라 시장에서의 존폐가 갈리는 무서운 시장이기도 하다.
◆소비자 권리 찾고 제도 뒷받침돼야
글로벌기업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내 소비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와 함께 소비자들의 의식변화도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정부 관리의 사각지대, 법규는 없지만 위해성이 있는 경우, 기타 사각지대를 줄여야 소비자 권리가 살아날 것”이라며 “문제를 혼자 해결하기보다는 여럿이 한 목소리를 내며 스스로 권익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와 관련 업계 관계자는 “소비자지향적인 제도가 세워져야 기업들도 차별하지 못할 것”이라며 “물건에 대한 대가인 돈을 지불하는 건 소비자 개인의 권리이자 가장 큰 무기”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5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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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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