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부 박지현씨(42)는 프리미엄냉장고를 구입한 이후 주방에 가는 게 즐겁다. 화면을 두드리면 밖에서도 식재료 확인이 가능하고 사람이 다가서면 문이 오픈, 서랍도 자동으로 나오는 등 첨단기술을 이용할 수 있어서다. 가격이 850만원으로 비싼 게 단점이지만 가전제품 하나로 고급스러운 주방이 연출돼 만족스럽다. 


#2. 직장인 정인영씨(31)는 주로 늦은 시간에 마트를 찾는다. 마트의 폐점시간이 가까워지면 유통기간이 임박한 물건을 싸게 판매해 필요한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특히 일요일 격주로 문을 닫는 대형마트는 전날 할인행사를 많이 열어 정씨는 필요한 물건을 메모했다가 그날 몰아서 산다.

소비 양극화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 경기불황으로 소득차가 벌어지면서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소비 간극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이다. 낮은 가격에 비해 가치가 높은 상품을 사려는 사람과 큰돈을 들여서라도 품격 있는 제품을 구입하려는 사람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 바로 ‘가치소비’다.


가치소비는 전세계에서 나타나는 경기불황형 소비트렌드다. 불황에는 립스틱 등 저가상품이 잘 팔리는 ‘립스틱 효과’가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는 소비자의 과시욕으로 가격이 비싼 제품을 선호하는 ‘베블런 효과’가 공존한다.

해외는 어떨까.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선진국도 값비싼 물건을 구입하는 소비를 줄이고 가치에 초점을 맞춘 가치소비가 대세다. 특히 상위계층의 소득집중도가 감소해 소득불균형이 줄어든 데다 소득수준과 상관없이 전반적으로 지갑을 닫는 분위기다.


캐나다 달러스토어. /사진제공=달러스토어
캐나다 달러스토어. /사진제공=달러스토어

◆미국, 소비 증가율 0%, 쇼루밍 현상

지난 8월 미국의 개인소비지출 증가율은 0%다. 시장전문가들이 0.1% 증가를 예상했지만 전월(0.4%)보다 0.4%포인트 하회했다. 미국의 가치소비는 무조건 저가제품을 선호하기보다 더 나은 사용경험, 기술적 차이 등이 높은 제품에 지출하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 미국의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0%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기초적이고 단순한 제품을 원한다’고 답했다.

일반마트에 비해 반값 또는 그 이상으로 저렴한 달러스토어의 증가도 가치소비의 인기를 방증한다. 단돈 1달러, 99센트의 물건을 파는 달러스토어는 지난 10년간 1만개나 급증해 총 2만4000개에 달한다. 저렴한 생필품을 사려는 소비자가 늘면서 달러스토어는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유통망으로 자리 잡았다.


또 동일제품 구매 시 비용절감을 위해 오프라인에서 물건을 확인하고 온라인 등 저가채널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쇼루밍’(Showrooming) 현상도 급증했다. 대형쇼핑몰 월마트는 지난 1월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 269개 매장을 폐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매장을 찾는 고객이 줄어 수익이 감소한 탓이다. 반면 온라인 유통업체 아마존은 1분기 5억1430만달러(약 5837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실현했다.

박현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020년까지 주요 선진국의 가구소득이 위축될 것으로 보여 가치소비가 장기 소비트렌드로 고착화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유럽, 자체브랜드·B급 상품 인기

유럽은 자체브랜드(PB)에 가치소비족들이 열광한다. 제품의 핵심기능을 극대화하되 가격은 일반 슈퍼마켓 수준으로 낮춰 인기를 끈 것이다. 스웨덴과 스페인, 영국 등은 PB제품이 시장점유율(판매액 기준) 40%를 넘어섰다.

아울러 버려지는 것들로 희소가치를 높인 상품도 주목받는다. 스위스의 ‘국민가방’으로 불리는 프라이탁(Freitag)은 쓰레기를 뜯어모아 만든 가방이다. 가방 천은 트럭 위에 씌우는 방수천이고 어깨끈은 폐차에서 뜯어낸 안전벨트다. 또 접합부는 자전거 바퀴의 고무튜브로 붙였다. 가방은 여러 물질이 결합돼 화학제품 냄새가 꽤 나지만 50만원 전후의 고가에도 인기리에 팔린다. 재활용품을 일일이 겹쳐 만들었기 때문에 똑같은 디자인이 단 하나도 없다는 희소성에 사람들의 인기를 끈다.

네덜란드 벤처기업이 개발한 조립식 스마트폰 ‘페어폰’(FairPhone)은 중저가제품인 데다 소정의 돈을 기부할 수 있어 인기다. 기부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비자에게 매력을 어필한 제품이다. 페어폰은 비분쟁지역에서 생산된 광물만을 사용해 안전한 노동환경이 보장된 공장에서 조립된다. 휴대폰이 한대 팔릴 때마다 2.5달러씩 기부돼 노동자 복지에 쓰인다. 가격은 525유로(약 66만원)로 일반 중저가 스마트폰 수준이고 소비자들은 온라인 주문으로 배달받은 주요 부품을 직접 조립해야 하지만 수고가 아깝지 않다는 반응이다.

유미연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합리적인 소비 대안으로 B급제품이 주목받는다”며 “가성비 외에 B급제품이 가진 다양한 활용가치가 소비자들을 움직이고 있다. B급제품을 통해 발굴될 경험가치가 성숙된 소비시장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일본 디럭스토어. /사진=머니S DB
일본 디럭스토어. /사진=머니S DB

◆일본, 단카이주니어… 중국, 바링허우

아시아에선 일본의 ‘단카이주니어’ 세대가 가치소비를 이끈다. 베이비붐세대 ‘단카이’의 자녀들로 소득수준이 높은 맞벌이 부모 아래 성장해 교육수준이 높지만 경기침체와 과열경쟁에 시달려온 이 세대는 저렴한 가격의 제품 구매를 선호한다. 드럭스토어 마츠모토키요시, ‘일본의 이케아’로 불리는 니토리, 저가격의류전문점 시마무라 등의 카테고리킬러업체와 미니스톱·세븐일레븐 등 편의점이 이들의 구매욕구를 자극해 수익을 내고 있다.

중국의 20~30대 바링허우는 형제·자매가 없이 경제적인 풍요를 즐기며 성장한 1자녀 세대다. 2억2000만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자신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투자를 아끼지 않는 가치소비의 특징이 있다. 자신만의 공간을 꾸미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 덕분에 중국의 소프트인테리어산업은 최근 5년간 급성장, 현재 연간 2000억~3000억위안의 시장을 형성했다.

코트라 관계자는 “일본은 가치소비가 절약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중국은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소비가 늘어나는 것이 포인트”라며 “일본·중국에 진출할 경우 이들의 가치소비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고급제품보다 패스트패션을 기반으로 단기간에 사용하고 소비하는 제품 위주로 판매전략을 세우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5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