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가 창립 55년 만에 존폐 기로에 섰다. 올 들어 두번이나 불미스러운 정경유착 의혹에 휘말려서다. 극우보수단체 ‘대한민국 어버이연합’ 우회 지원에 이어 현 정권 비선실세가 개입된 ‘미르·K스포츠재단’ 관련 의혹에도 깊게 연루된 정황이 드러났다. 당장 정치권, 재계, 시민단체 등이 앞다퉈 해체를 강력 요구하고 있다. 차선책으로 개혁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거세다.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전경련은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권력형 비리가 있을 때마다 증거인멸과 꼬리 자르기로 무마하는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과거 전경련이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개발연대의 기능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 최근 저성장 극복과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적 요구 속에서 전경련의 존재감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지난 10월14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DB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지난 10월14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DB

지난 10월19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서울 종로구 경실련 강당에서 경제·경영학자 등 전문가 312명의 중지를 모아 연 기자회견에서 나온 말이다. 이날 경실련은 “정경유착을 넘어 노골적 정치개입으로 이념대결, 국론분열을 조장하는 전경련은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갈등의 진원지로 전락했다”며 “자정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해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복된 정경유착 흑역사

전경련은 스스로를 “자유시장경제의 창달과 건전한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 올바른 경제정책을 구현하고 우리경제의 국제화를 촉진하기 위해 1961년 민간경제인들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설립된 순수 민간종합경제단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일본에 머물렀던 당시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경제단체를 만들어 정부의 산업정책에 협력할 것을 요청받아 만든 ‘경제재건촉진회’가 모태다. 이 단체는 같은 해 이름을 ‘한국경제인협회’로 바꿨고 1968년 주요 민간기업체는 물론 금융기관과 국책회사까지 회원사를 크게 늘리며 현재의 ‘전국경제인연합회’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태생적 한계를 가진 전경련은 지난 세월 수차례 정경유착 관련 의혹에 휘말리며 도마 위에 올랐다. ▲전두환 전 대통령 퇴임 후 대비용 일해재단 설립 자금 모금(1984~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지원(1995년) ▲불법대선자금 조성(1997년 세풍 사건, 2002년 차떼기 사건) 등이 대표적 사건이다. 


지난 4월에는 전경련이 청와대의 지시를 받고 2014년 4~11월 세월호 유가족을 비판하는 집회를 연 1200여명의 어버이연합 회원에게 1억2000만원을 지급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최근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차은택씨가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 과정에서 이틀 만에 대기업으로부터 774억원을 걷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본인의 아이디어였고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돈을 준 이들은 배후의 청와대를 보고 낸 사실상의 ‘강제 모금’이라는 입장이다.

이처럼 설립부터 최근까지 끊임없이 정경유착 흑역사를 되풀이한 전경련은 대기업 중심의 개발경제시대가 끝났다는 시대적 무용론까지 제기되면서 존속이냐 개혁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전경련 회관 전경. /사진=뉴시스 DB
전경련 회관 전경. /사진=뉴시스 DB

◆안팎서 해체요구 봇물

정치권, 재계, 시민단체 등은 전경련 해체를 요구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권 3당은 “전경련은 자유시장경제의 창달이 아니라 강제 모금이나 하는 단체로 드러났다”며 “청와대를 등에 업은 심부름꾼에 불과한 전경련은 당장 해체해야 한다”고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지난 10월17일 “전경련 해체는 권력에 결탁한 강자만 행복한 ‘이권추구 경제’가 아니라 모든 경제주체가 함께 행복한 ‘정의로운 경제’로 나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는 주장과 함께 여야 국회의원 73명의 서명을 받아 전경련 해산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여권 일각에서도 전경련 해체 주장이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 소속으로는 유일하게 김용태 의원이 전경련 해체 결의안에 서명한 가운데 여권의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는 유승민 의원은 “정부가 규제개혁회의 등의 회의에 전경련을 부르지 않고 공공기관을 전경련에서 빠져나오게 하면 금방 해체될 것”이라며 해체 방법론을 제시했다.

국가미래연구원, 경제개혁연구소, 경제개혁연대 등은 “민주주의와 시장 질서를 해치는 정경유착에 휘말려 국민경제 발전에 역행한 전경련은 존립 근거를 잃었고 자정능력도 상실했다”며 “존속 이유가 사라진 만큼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승철 부회장이 전경련 운영 실권을 장악한 이후 정권과 결탁해 마음대로 운영하며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것 같다”며 “지금처럼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재계 이익 대변이 아닌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는 전경련의 해체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와 전경련은 해체보다 개혁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이석준 국무조정실장과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번 국정감사에서 “전경련 해체는 기본적으로 회원들이 결정할 사항”이라며 “앞으로 전경련이 설립목적에 맞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승철 부회장도 국감에 증인으로 출석해 전경련 해체론에 대해 “소명을 충실히 해서 국민의 신뢰를 받는 단체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권한을 가진 당사자들은 해체론을 일축한 셈이다.

이와 관련 국회 차원에서 차선책으로 비영리법인의 부적절한 행위 시 주무부처가 해산을 강제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비영리법인의 설립·운영 및 감독에 관한 법률안’ 제정과 대기업의 부당한 공동행위를 막고 공공기관의 이익단체 탈퇴를 규정한 ‘공정거래법과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 전경련 강제 개혁 방안을 논의 중이다. 해체와 개혁,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전경련이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5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