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초반까지의 ‘길’은 자동차가 우선이었다. 길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만들 때 사람보다 차량의 원활한 소통을 더 고민했다. 도로의 여러 시설물도 운전자 입장에서만 검토했고 보행자를 배려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시설물이 육교다. 자동차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도로 위 높은 곳에 설치한 시설물이어서 길을 건너려면 꽤 높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신체가 건강한 사람은 상관 없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유모차와 휠체어 이용자 입장에선 황당하기 그지없는 시설이다.

이런 분위기가 달라진 건 2004년쯤부터다. IMF 외환위기의 상처가 아물 때쯤 주5일 근무제도가 도입되고 삶의 질에 대한 욕구와 고민이 커졌다. 나아가 서울시는 당시로선 꽤 파격적인 ‘버스중앙차로제’를 도입했다. 버스가 도로 가운데 설치된 전용차선으로 다녀야 하고 정거장은 도로 가운데 섬처럼 설치됐다. 도로엔 자연스레 횡단보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서서히 자전거와 사람을 위한 길이 정비되고 그 수가 증가했다. 특히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처럼 유명관광지를 중심으로 ‘걷는’ 길이 관심을 끌었고 다녀온 사람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자동차에 빼앗긴 길이 서서히 사람의 품으로 돌아오는 중요한 흐름의 시작인 셈이다.


서울 한양도성 길. /사진제공=사단법인 한국의길과문화
서울 한양도성 길. /사진제공=사단법인 한국의길과문화

◆‘걷기’ 개념이 바뀌다

# “건강이 최고”라는 이모씨(61)가 저녁마다 즐겨 찾는 곳은 집 근처 하천 산책길이다. 길이 걷기 좋게 잘 정비된 데다 다양한 운동기구가 곳곳에 설치돼 헬스클럽이 부럽지 않다. 특히 이씨처럼 운동하러 나온 사람이 많고 곳곳에 안전을 위한 CCTV와 긴급호출시설도 있어 든든하다.

최근 이씨처럼 걷기의 매력에 빠진 사람이 많다. 주변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길’이나 ‘□□산책로’라고 쓰인 간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잘 가꿔진 길을 산책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예전엔 산에 간다고 하면 힘겹게 정상에 오르는 ‘등산’을 가장 먼저 떠올렸지만 요즘에는 ‘둘레길’이 대세다. 이는 걷기의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클라임(climb), 가벼운 산행인 트레킹(trekking), 자연 속을 걷는 트레일(trail)로 개념이 세분화된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지리산 둘레길. /사진=뉴시스 송기홍 기자
지리산 둘레길. /사진=뉴시스 송기홍 기자

대표적 트레킹 코스는 지리산 둘레길이다. 트레킹은 산행이지만 정상을 오르는 것보다 산 자체의 풍광을 즐기는 걸 목적으로 한다.

우리나라 산은 낮지만 길이 험하고 경사가 높은 곳이 꽤 있다. 반면 외국의 산은 지대가 높은 데 비해 경사가 완만하고 험하지 않은 곳이 많다. 똑같은 등산이라 해도 외국인과 우리 국민이 받아들이는 개념이 다른 이유다.


트레일은 제주도 올레길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산, 강, 호수, 바다 등 자연 속에서 경치를 즐기며 가볍게 걷는 행동이 트레일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자 아웃도어업계도 걷기에 주목한다. 무겁고 비싼 고가의 등산장비 대신 가볍고 합리적인 가격대의 신제품 라인업을 구성하면서 승부수를 던진 것. 캠핑이나 등산시장이 포화상태에 달한 데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 악재가 겹쳐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담양 메타세쿼이아길. /사진제공=사단법인 한국의길과문화
담양 메타세쿼이아길. /사진제공=사단법인 한국의길과문화

◆공간 잇는 길, 걷기의 매력 더한다

어디론가 이동하는 방법 중 가장 느린 수단이 걷기다. 하지만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느림의 미학을 체험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등록된 ‘△△길’은 총 591곳이며 코스는 1642개다. 이들 코스의 거리를 합하면 약 1만7000km나 된다. 집 주변 등산로부터 걷기 좋은 곳은 웬만하면 다 등록됐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모든 길이 활성화된 건 아니다. 일부 코스는 이용하는 사람이 적어 폐쇄되기도 했고 시설보완을 앞둔 곳도 있다.


걷기와 관련한 모든 것을 다루는 사단법인 한국의길과문화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길·걷기문화는 과도기에서 안정기로 접어드는 중이다. 그동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유명관광지를 중심으로 걷는 길을 만들었는데 최근엔 등산이 어려운 신체약자와 유모차를 끌고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길이 구성돼 이용자가 크게 늘었다.

사람이 모이자 전국 곳곳엔 우후죽순처럼 ‘△△길’이 생겼다. 하지만 지자체 홍보목적이 강한 단거리 코스가 많고 길과 길 사이의 연결성이 떨어지는 등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

최근엔 민간단체가 코스개발과 관리를 맡으며 조금 더 사용자 친화적인 길로 개선되는 추세다. 특히 장거리코스를 개발하면서 대중교통과의 연결성에 주목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짧은 코스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왕복하면 되지만 긴 코스는 대중교통이 유리하다”며 “코스의 성패는 결국 연결성에 달렸다”고 강조했다.


해파랑길. /사진제공=사단법인 한국의길과문화
해파랑길. /사진제공=사단법인 한국의길과문화

◆모든 길 아우르는 ‘코리아 둘레길’

정부는 지난 10여년 동안 새로운 길을 만드는 데 집중했지만 이제는 그동안 만든 길을 연결하는 ‘코리아둘레길’ 사업에 집중할 계획이다. 이는 걷기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다양하게 커졌고 과거와 달리 이용자의 태도 또한 적극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한국의길과문화 관계자는 “원래는 한반도둘레길이라는 이름으로 동해안의 해파랑길과 남해안 서해안을 연결하는 길을 구상했다”며 “해파랑길을 완주한 여행자들이 서해안과 남해안을 잇는 길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컸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지금은 코리아둘레길이라는 이름으로 동해, 남해, 서해, DMZ를 순환하는 길을 계획 중”이라고 덧붙였다.

코리아둘레길 사업은 마을길, 숲길, 해안길 등을 활용해 기존에 조성된 길을 연결하는 게 핵심이다. 기존에 조성된 길을 코리아둘레길 코스로 활용하되 관리가 안되는 길은 재정비할 계획이다. 하지만 시설은 최소화해 관리비를 줄이고 자원봉사자 중심으로 길을 운영·관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람이 걷는 길이 늘어난다는 건 장소와 장소, 자원과 자원이 서로 연결됨을 의미한다.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을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 즉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이다. 청계천이나 서울성곽길처럼 도심 속 걷기 명소를 사람이 많이 찾는 이유다.


※ 유모차와 휠체어도 거뜬, 쉽게 걷는길
가야산 소리길
개화산 자락길
계룡산 국립공원 탐방로
관악산공원 무장애 숲길
구포 무장애 숲길
남산순환나들길
담양오방길
명품금강소나무 숲길
북한산둘레길
새재넘어 소조령길
안산자락길
제주 올레길
주왕산 탐방로
태안 해변길
화성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 탐방로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