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경기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지갑을 닫는 소비자가 늘었다. 여기에 생산가능인구 감소, 대내외 불확실성 확대 등 부정적 경제 전망이 소비위축을 더욱 부추긴다. 소비 감소는 생산 감축으로 이어진다. 생산이 줄면 소득이 감소해 자연스레 소비도 위축된다. 소비가 급격히 줄어드는 ‘소비절벽’이 우리나라 경제 전체를 경직시키는 악순환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머니S>는 소비절벽시대를 긴급 진단했다. 서울 주요 상권 및 유통가의 분위기를 살피고 새로운 소비트렌드를 분석했다. 정부와 기업의 소비절벽 극복 대책과 전문가로부터 해법도 들었다.<편집자주>

“연말 분위기가 안납니다.”

을지로 인근에서 10년 넘게 주점을 운영해온 백모씨(52)의 한숨 섞인 말이다. 물론 이 상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에 ‘소비절벽’ 여파가 미치며 상권 자체가 얼어붙었다.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줄 고객의 발길이 끊긴 탓이다. 

상인들에게 연말 분위기는 손님 수로 좌우된다. 북적대는 인파로 잠시도 쉴 틈이 없는 서빙, 직장인들의 시끌벅적한 건배 행렬, 취객의 소소한 말다툼. 상인들에게는 이 모든 풍경이 곧 연말 분위기지만 지난해 연말은 달랐다. 경기불황 속 거리에는 취객이 줄고 식당종업원은 하릴없이 TV를 보는 시간이 많았다. 지난해 12월 말, 소비절벽시대를 맞은 상권의 표정을 둘러봤다. 

특히 주말보다 평일장사가 잘돼 이른바 ‘직장인 상권’으로 통하는 종각역, 을지로역, 광화문역 일대에서 소비절벽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봤다.

무교동 식당거리. /사진=김정훈 기자
무교동 식당거리. /사진=김정훈 기자

◆단체예약 줄어 식당가 ‘썰렁’

송년회가 한창인 12월 마지막주. 오후 6~7시 퇴근시간이 지나며 직장인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인파가 대부분이고 무교동 인근 상권으로 발길을 옮기는 무리는 많지 않았다. 

간혹 10여명의 무리가 회식을 위해 고깃집을 찾았지만 극히 드문 경우다. 2~3명씩 짝지어 술집을 찾는 남녀 직장인도 보였지만 거리를 채우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골목 구석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는 직장인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보다 더 많아 보였다. 

무교동 낙지가게 상인 A씨는 “확실히 지난해보다 회식예약이 줄었다”며 “평일 저녁은 단체예약이 주매출인데 요즘 회식 자체가 줄어 타격이 크다”고 푸념했다. 

오후 7시30분. 종각역 젊음의 거리로 이동했다. 직장인뿐만 아니라 종로 인근 영어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의 약속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침체된 무교동 거리에 비하면 확실히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유명 맛집과 프랜차이즈식당 위주로 고객이 몰려 한산한 식당이 많았다. 이곳에서 치킨집을 6년째 운영 중인 B씨는 “6년 동안 이렇게 장사가 안된 적은 없었다. 11~12월 두달간 최악의 매출을 찍었다”며 “그나마 젊음의 거리는 무교동이나 충무로쪽에 비해 주말에도 유동인구가 많아 좀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종각역 젊음의 거리. /사진=김정훈 기자
종각역 젊음의 거리. /사진=김정훈 기자

오후 8시30분. 종로역 인근 피맛골로 이동했다. 한참 회식이 진행중인 식당이 많았다. 곳곳에서 건배 함성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단체손님 외 테이블은 한산했다. 

피맛골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C씨는 “지난해 12월보다 손님은 줄었지만 단체예약이 많아 매출 하락 폭이 크진 않다”며 “우려되는 건 개인 손님이 줄어 저녁시간임에도 식당 내부가 가끔 휑하다. 이런 가게 모습을 보면 나라도 들어가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한편 C씨 고깃집 옆에서 닭갈비집을 운영하는 D씨는 기자에게 다가와 사진을 찍지 말라며 취재를 중단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기사 나가면 손님 더 떨어진다”며 “왜 여기서 이러나. 당장 다른 곳으로 가라”고 큰소리를 냈다. 

서점가도 소비절벽 여파가 미쳤을까. 종로 영풍문고와 광화문 교보문고는 비교적 한산했다. 평소 같으면 자리 맡기가 대학도서관만큼이나 힘든 구독용 좌석에도 빈자리가 군데군데 보였다. 영풍문고 관계자는 “크리스마스 선물시즌이 끝나 한산해보일 것”이라며 “매출에는 큰 변화가 없어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 고객이 적은 시간대가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종로 영풍문고. /사진=김정훈 기자
종로 영풍문고. /사진=김정훈 기자
죽전 신세계백화점. /사진=김정훈 기자
죽전 신세계백화점. /사진=김정훈 기자

◆연말특수 못 누리는 백화점

다음날 오후 7~9시.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죽전 신세계백화점을 찾았다. 이곳은 다른 백화점과 달리 죽전역과 연계돼 평일 저녁 직장인의 발길이 유독 많은 곳이다. 퇴근 후 들르는 고객을 위해 폐점시간도 일반 백화점보다 한시간 연장된 밤 9시다. 지난해 8월까지는 밤 10시까지 운영했다. 

소비절벽 여파는 이곳에서도 감지됐다. 1층 화장품매장을 비롯 2~6층에 마련된 패션매장에는 소수의 고객만이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 사진을 찍는 기자에게 매장 점원들의 이목이 집중될 정도로 유동고객이 적었다. 에스컬레이터로 한층씩 올라갈 때마다 멀뚱히 서 있는 점원과 어색한 눈빛 교환이 이어졌다. 

1층 화장품매장 관계자는 “지난 23~25일엔 크리스마스 선물수요가 많아 일 매출이 1000만~1500만원을 기록했지만 26일부터 300만원 수준으로 감소했다”며 “백화점을 방문하는 고객 자체가 많지 않다. 이런 상황도 모르고 본사에서는 ‘연말인데 매출이 왜 이러냐’며 압박을 주니 답답할 노릇”이라고 말했다. 

썰렁한 패션·뷰티매장에 비해 지하1층 식품관, 7층 식당가, 8~9층 CGV영화관 등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부분 저녁식사를 하려는 사람,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이었다. 식품관 일부 매장의 경우 요즘 인기가 많은 ‘대만카스테라’를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식품관도 일부 매장 외에는 고객의 소비가 활발하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다. 소비를 최소로 줄이고 자신에게 꼭 필요한 물품만 사려는 고객이 많아보였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주부 박모씨(44)는 “아이 신발 구매차 백화점에 들렀는데 가격이 생각보다 너무 비싸 인터넷으로 주문할 생각”이라며 “그래도 모처럼 아이들과 외출했으니 맛있는 밥이라도 먹고갈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를 마친 후 귀갓길에 담배를 사려고 동네마트에 들렀다. “요즘 어떠냐”고 질문을 던지자 마트 사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올해는 정말 쉽지 않네요.”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