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4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를 잡기 위해 통 큰 빚 탕감정책을 내놨다. 이달 안에 금융위원회 소관인 금융공공기관이 보유한 장기·소액연체채권을 전부 소각하고 연내 금융회사의 채권 소각도 유도할 방침이다. 대상자는 2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25조원에 달하는 빚을 한번에 없애주는 서민금융정책에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머니S>는 정부의 빚 탕감정책을 꼼꼼히 뜯어보고 역대 정권의 채무조정 추진사례를 진단했다. 나아가 채무조정정책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파헤쳤다.<편집자주>


채권은 추심을 해야 의미가 있다. 단기간 내 받으려 하지 않으면 채권의 의미는 점차 퇴색된다. 소멸시효제도의 취지도 이와 같다. 일정기간 안에 추심하지 않으면 빚을 받을 권리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그 기간이 5년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멸시효가 거의 완성된 채권을 헐값에 사고 채무자로 하여금 다시 빚을 갚도록 유인하는 꼼수가 등장했다. 소멸시효에 다가갈수록 이자가 불어나 채권자는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지만 채무자는 빚이 더 늘어 숨어 지내는 신세가 된다. 문재인정부가 200만명 이상의 빚을 전면 탕감키로 한 배경이다.


하지만 새정부의 빚 탕감정책은 찬반 논란에 휩싸였다.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킬 것이란 목소리와 장기소액연체채권이 서민을 금융소외계층으로 몰아넣고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만큼 빚 탕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립한다. 이번 빚 탕감정책을 놓고 논란이 뜨거운 건 역대 정권과 달리 빚을 100% 탕감하겠다는 계획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과거 정부의 빚 탕감정책이 실패한 이유로 취약계층의 빚을 100% 없애주지 않았다는 점이 꼽힌다. 전문가들은 빚 탕감정책이 효과를 보기 위해선 보다 체계적인 플랜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100% 탕감해야 의미 있는 ‘국민행복기금’

빚 탕감정책은 이전 정부에서도 시행됐다. 박근혜정부 때 빚의 일부를 탕감한 적이 있지만 모두 없애주겠다는 건 문재인정부가 처음이다. 이 지점에서 서민금융공공기관의 역할론을 놓고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행복기금은 2013년 3월 박근혜정부가 가계부채를 해결하겠다며 설립한 대표적인 신용회복지원기관이다. 제도권 금융에서 소외된 서민들이 경제적으로 회생할 수 있도록 연체채권 채무조정, 바꿔드림론(고금리 대출의 저금리 전환대출), 자활프로그램 제공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민간 금융회사의 연체채권을 매입해 원금의 50~70%를 탕감하고 나머지는 원금과 이자로 상환케 한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박근혜정부는 금융소외자의 과도한 채무부담을 줄여 회생의 기회를 제공하고 경제활동의 주체로 복귀시킨다는 취지로 프로그램을 운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는 비판이 많았다. 빚을 100% 탕감해주지 않아 금융 취약계층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

여기에 시효 완성을 앞둔 상태의 채권을 헐값에 사서 일부만 탕감한 채 나머지는 다시 ‘유통’시킨 부분에 대해서도 지적이 제기됐다. 국민행복기금은 이 과정에서 이익을 챙겨 ‘서민금융공공기관’이 아닌 ‘서민 대상의 수익성 추심사업체’라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 문재인정부는 국민행복기금의 소멸시효완성채권을 100% 지우겠다고 밝혔다. 이는 금융취약계층에게 실질적인 재기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과거 정부와 다르다. 제윤경 의원실(더불어민주당)이 캠코 지원자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행복기금 채무조정 지원자의 연평균 소득은 2014년 말 기준 425만7000원에 불과했다. 평균 빚은 1042만9000원이었는데 전체 채무금액 가운데 500만원 미만인 경우가 42.8%로 가장 많았다. 이번 정책이 빚을 못 갚아 숨어 지내는 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채권자 중심의 금융정책이 ‘채무자와 채권자가 동등하다’(채무자=채권자)는 인식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의 책임이 크지만 그에 못지않게 리스크가 큰, 즉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이에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의 책임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간금융기관이 아닌 서민금융공공기관이라면 더더욱 ‘채무자=채권자’의 금융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논리다.


◆실효성 높이려면… 복지정책 병행돼야

전문가들은 이번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체계적인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남주하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2013년 국회 예산정책처의 연구용역사업을 수행하며 발표한 논문 <서민금융제도의 현황 및 발전방안>을 통해 서민을 위한 신용회복제도 개선방안으로 ‘소액금융지원프로그램 확대 및 단순화’를 강조했다. 서민이 급전이 필요할 때나 빚을 갚을 때는 보통 소액일 경우가 많아 관련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남 교수는 서민 금융지원의 활성화를 위해 ▲신용회복위원회의 소액금융지원 ▲신용회복기금의 바꿔드림론(국민행복기금) ▲캠코 희망대출 등의 자격대상 완화 ▲대출한도 확대 ▲상환조건 완화 등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빚 탕감의 경우 장기연체자의 소득과 재산을 철저히 조사하고 장기적으로 관리해 도덕적 해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지자체별로 빚 탕감에 대한 상담센터를 운영하는 등 이 분야의 복지정책이 동시에 시행돼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울시 산하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가 대표적인데 이 센터는 기금을 마련해 이자를 면제해주거나 빚을 탕감해주지 않는다. 대신 저소득 채무자가 이곳에 상담받으러 오면 사회복지사가 재기를 위해 나은 방법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한다. 사회복지사는 상담 후 탕감받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될 경우 채무자에게 구제제도를 안내한다.

2013년 7월 문을 연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는 지난달 말까지 서울시민 3500명의 빚 7900억원을 탕감해줬다.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는 현재 ▲중앙센터 1개 ▲구청 내 센터 9개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고용복지플러스센터 내 2개 ▲LH(한국주택공사) 마이홈센터 내 1개 등 13개 센터를 운영 중이다. 여기에 서울시는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이른바 ‘찾동사업’을 통해 복지가 필요한 부분을 조사하고 빚과 관련된 문제라면 이 센터로 안내한다.

박정만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장(변호사)은 “빚 탕감정책은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각각의 역할을 통해 시행해야 한다”며 “지자체의 서민금융상담 네트워크를 통하면 실제로 빚 탕감이 필요한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계부채가 임계치를 넘어선 현재의 경우 협상력이 강한 중앙정부가 직접 나서 장기연체채권을 소각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그는 설명했다. 박 센터장은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와 같은 지자체 상담센터는 사실상 서울·경기권에서 활발하다”며 “다른 지자체에서도 이 같은 상담센터를 적극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1호(2017년 8월16~2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