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빚 탕감’] 탕감책 성공의 조건
서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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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은 추심을 해야 의미가 있다. 단기간 내 받으려 하지 않으면 채권의 의미는 점차 퇴색된다. 소멸시효제도의 취지도 이와 같다. 일정기간 안에 추심하지 않으면 빚을 받을 권리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그 기간이 5년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멸시효가 거의 완성된 채권을 헐값에 사고 채무자로 하여금 다시 빚을 갚도록 유인하는 꼼수가 등장했다. 소멸시효에 다가갈수록 이자가 불어나 채권자는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지만 채무자는 빚이 더 늘어 숨어 지내는 신세가 된다. 문재인정부가 200만명 이상의 빚을 전면 탕감키로 한 배경이다.
하지만 새정부의 빚 탕감정책은 찬반 논란에 휩싸였다.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킬 것이란 목소리와 장기소액연체채권이 서민을 금융소외계층으로 몰아넣고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만큼 빚 탕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립한다. 이번 빚 탕감정책을 놓고 논란이 뜨거운 건 역대 정권과 달리 빚을 100% 탕감하겠다는 계획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과거 정부의 빚 탕감정책이 실패한 이유로 취약계층의 빚을 100% 없애주지 않았다는 점이 꼽힌다. 전문가들은 빚 탕감정책이 효과를 보기 위해선 보다 체계적인 플랜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100% 탕감해야 의미 있는 ‘국민행복기금’
빚 탕감정책은 이전 정부에서도 시행됐다. 박근혜정부 때 빚의 일부를 탕감한 적이 있지만 모두 없애주겠다는 건 문재인정부가 처음이다. 이 지점에서 서민금융공공기관의 역할론을 놓고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행복기금은 2013년 3월 박근혜정부가 가계부채를 해결하겠다며 설립한 대표적인 신용회복지원기관이다. 제도권 금융에서 소외된 서민들이 경제적으로 회생할 수 있도록 연체채권 채무조정, 바꿔드림론(고금리 대출의 저금리 전환대출), 자활프로그램 제공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민간 금융회사의 연체채권을 매입해 원금의 50~70%를 탕감하고 나머지는 원금과 이자로 상환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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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
박근혜정부는 금융소외자의 과도한 채무부담을 줄여 회생의 기회를 제공하고 경제활동의 주체로 복귀시킨다는 취지로 프로그램을 운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는 비판이 많았다. 빚을 100% 탕감해주지 않아 금융 취약계층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
여기에 시효 완성을 앞둔 상태의 채권을 헐값에 사서 일부만 탕감한 채 나머지는 다시 ‘유통’시킨 부분에 대해서도 지적이 제기됐다. 국민행복기금은 이 과정에서 이익을 챙겨 ‘서민금융공공기관’이 아닌 ‘서민 대상의 수익성 추심사업체’라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 문재인정부는 국민행복기금의 소멸시효완성채권을 100% 지우겠다고 밝혔다. 이는 금융취약계층에게 실질적인 재기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과거 정부와 다르다. 제윤경 의원실(더불어민주당)이 캠코 지원자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행복기금 채무조정 지원자의 연평균 소득은 2014년 말 기준 425만7000원에 불과했다. 평균 빚은 1042만9000원이었는데 전체 채무금액 가운데 500만원 미만인 경우가 42.8%로 가장 많았다. 이번 정책이 빚을 못 갚아 숨어 지내는 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채권자 중심의 금융정책이 ‘채무자와 채권자가 동등하다’(채무자=채권자)는 인식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의 책임이 크지만 그에 못지않게 리스크가 큰, 즉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이에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의 책임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간금융기관이 아닌 서민금융공공기관이라면 더더욱 ‘채무자=채권자’의 금융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논리다.
◆실효성 높이려면… 복지정책 병행돼야
전문가들은 이번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체계적인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남주하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2013년 국회 예산정책처의 연구용역사업을 수행하며 발표한 논문 <서민금융제도의 현황 및 발전방안>을 통해 서민을 위한 신용회복제도 개선방안으로 ‘소액금융지원프로그램 확대 및 단순화’를 강조했다. 서민이 급전이 필요할 때나 빚을 갚을 때는 보통 소액일 경우가 많아 관련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남 교수는 서민 금융지원의 활성화를 위해 ▲신용회복위원회의 소액금융지원 ▲신용회복기금의 바꿔드림론(국민행복기금) ▲캠코 희망대출 등의 자격대상 완화 ▲대출한도 확대 ▲상환조건 완화 등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빚 탕감의 경우 장기연체자의 소득과 재산을 철저히 조사하고 장기적으로 관리해 도덕적 해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지자체별로 빚 탕감에 대한 상담센터를 운영하는 등 이 분야의 복지정책이 동시에 시행돼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울시 산하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가 대표적인데 이 센터는 기금을 마련해 이자를 면제해주거나 빚을 탕감해주지 않는다. 대신 저소득 채무자가 이곳에 상담받으러 오면 사회복지사가 재기를 위해 나은 방법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한다. 사회복지사는 상담 후 탕감받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될 경우 채무자에게 구제제도를 안내한다.
2013년 7월 문을 연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는 지난달 말까지 서울시민 3500명의 빚 7900억원을 탕감해줬다.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는 현재 ▲중앙센터 1개 ▲구청 내 센터 9개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고용복지플러스센터 내 2개 ▲LH(한국주택공사) 마이홈센터 내 1개 등 13개 센터를 운영 중이다. 여기에 서울시는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이른바 ‘찾동사업’을 통해 복지가 필요한 부분을 조사하고 빚과 관련된 문제라면 이 센터로 안내한다.
박정만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장(변호사)은 “빚 탕감정책은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각각의 역할을 통해 시행해야 한다”며 “지자체의 서민금융상담 네트워크를 통하면 실제로 빚 탕감이 필요한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계부채가 임계치를 넘어선 현재의 경우 협상력이 강한 중앙정부가 직접 나서 장기연체채권을 소각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그는 설명했다. 박 센터장은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와 같은 지자체 상담센터는 사실상 서울·경기권에서 활발하다”며 “다른 지자체에서도 이 같은 상담센터를 적극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1호(2017년 8월16~2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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