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빚 탕감’] "재기 기회" vs "혈세 낭비"
허주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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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재인정부가 야심 차게 내놓은 서민·취약계층을 위한 금융지원정책을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핵심쟁점은 장기·소액연체자를 대상으로 한 소멸시효완성채권 소각이다. 금융당국은 연내 25조원 규모의 금융공공기관과 민간부문 소멸시효완성채권을 소각할 계획이다.
대상자는 200만명 이상이다. 연체채권이 소각되면 관련 기록이 삭제돼 빚을 갚을 의무가 사라지고 제도권 금융활동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꼬박꼬박 빚을 갚아나가는 성실 채무자에 대한 역차별 논란,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 등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적지 않다.
◆소멸시효완성채권 소각… 금융거래 가능
금융위원회는 이달 말까지 국민행복기금과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자산관리공사·예금보험공사·주택금융공사·농림수산업자신용보증기금 등 6개 금융공공기관이 보유한 소멸시효완성채권 21조7000억원에 대한 소각을 완료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빚의 수렁에 빠진 채무자 123만1000명의 금융활동이 다시 가능해질 전망이다.
채권의 소각은 기관별로 ‘내규정비→(미상각채권)상각→채권포기 의사결정(이사회 등)→전산 삭제 및 서류 폐기’ 절차를 거쳐 이뤄진다. 채무자는 다음달 1일부터 본인 연체채무의 소각 여부를 해당기관 개별 조회시스템 또는 신용정보원 소각채권 통합조회시스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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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소멸시효완성채권 처리방안 금융권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전신 뉴시스 기자 |
이와 함께 금융위는 민간 금융회사들이 연말까지 자율적으로 소멸시효완성채권을 소각하도록 권유할 방침이다. 대부업을 제외한 민간부문이 보유한 소멸시효완성채권은 지난해 말 기준 약 4조원(91만2000명)이다. 다만 KB국민·신한·우리은행 등 일부 은행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자율적인 소각을 실시 중이어서 소각대상 채권규모는 달라질 수 있다.
소멸시효완성채권은 금융채권의 상법상(상법 제64조) 소멸시효인 5년이 경과한 채권으로 소멸시효가 완성되면 채무자는 합법적으로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금융사 대다수가 법원의 지급명령 등을 통해 시효를 15~25년까지 연장시켜 관리해왔다.
또한 소멸시효가 완성됐더라도 채무자가 일부 빚을 갚으면 채무가 부활한다는 점을 악용해 채무자에게 채무상환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일부 선납금만 납부하면 원금을 대폭 감면해주겠다고 유혹해 소멸시효를 무력화하는 편법도 사용했다.
소규모 음식점을 운영하던 A씨는 IMF 외환위기 시절 장사가 어려워지면서 늘어난 빚과 생활고로 20년 가까이 힘들게 지냈다. 그러다 몇년 전 B대부업체에서 발송한 “일부 선납금만 납부하면 원금을 대폭 감면해준다”는 안내장을 받고 기존 채무에 대한 선납금을 납부한 후 감면된 금액의 채무이행각서를 작성했다. 이후 B업체는 A씨에게 다시 강한 추심을 재개했고 그의 고통은 더 커졌다.
소멸시효가 완성돼도 금융활동을 재개하기는 어렵다. 연체기록이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히기 때문이다. 농촌에 거주하는 C씨는 그동안 지역농협과 거래를 계속해왔으나 2003년 태풍 매미의 피해로 큰 작황피해를 겪은 이후 농업자금대출금을 갚지 못했다. 지인으로부터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무는 갚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C씨는 다시 금융거래를 시작해보려고 농협을 찾았지만 창구 직원으로부터 “소멸시효가 완성된 과거 채무는 갚을 필요가 없지만 해당 연체기록이 남아있어 신규거래는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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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대책 예고… 형평성 등 우려 여전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소멸시효 완성은 채무자의 변제능력이 없다는 의미”라며 “그간 정부는 소멸시효완성채권의 추심·매각 금지 가이드라인 등을 통해 사실상 채권소각에 준하는 효과가 발생하도록 노력해왔다. 하지만 불법·편법적 추심이나 시효중단 조치에 노출돼 피해를 입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해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소각을 실시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도권 금융시스템에서 탈락한 이들의 새 출발을 돕는 것은 시혜적 정책이 아니다”며 “이를 통해 경제의 활력을 제고함으로써 생산적 금융과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정부는 일회성 대책에 그치지 않고 제도화되도록 시효완성채권의 매각·추심금지, 소각 등을 위해 법제화가 필요한 부분은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들과 긴밀히 협조할 방침이다.
나아가 후속 대책도 준비 중이다. 주요 검토 내용은 ▲시효 만료 전인 10년 이상 1000만원 미만 장기·소액연체자에 대한 빚 탕감 방안 ▲금융권 개인 부실채권 2차 매각 시 캠코로 일원화 ▲소멸시효 만료된 법인 연대보증 채무 소각 등으로 알려졌다.
이 중 시효 만료 전인 장기·소액연체자 빚 탕감은 논란의 여지가 더 크다. 소멸시효완성채권은 이미 ‘죽은 채권’므로 소각에 별도의 자금이 필요하지 않지만 소멸시효 만료 전인 장기·소액채권 매입 및 소각에는 수조원의 세금 투입이 불가피해 혈세를 쓸데없는 곳에 낭비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장기·소액연체채권은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2조원가량이며 대상자는 40만3000여명이다. 시중은행과 대부업체 등이 보유한 소멸시효가 끝나지 않은 장기소액연체채권 규모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형평성 논란도 제기된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착실하게 채무를 변제하는 성실 채무자는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빚 탕감 대상자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이군희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부는 선심성 빚 탕감보다는 법적·제도적 인프라 구축에 집중해야 한다”며 “서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채권 소멸시효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금융위 관계자는 “빚의 수렁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시스템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며 “소멸시효완성채권 소각은 빚 탕감이 아니라 취약계층에 대한 채권추심 고통을 덜어주고 연체채무기록으로 인한 금융거래 제한을 풀어주는 의미가 강하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1호(2017년 8월16~2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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