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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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공대냐 지방 의대냐
대학배치표가 ‘진로결정표’가 돼선 안돼


2020학년도 대입 수시모집 서울대 합격자의 4.1%가 등록하지 않았다. 전국 대학교 중에 서울대 명성이 최고임에도 합격한 후 왜 포기했을까?


다른 대학교의 의대에 동시 합격한 자연계 수험생들이 의대로 가기 위해 서울대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수시모집에서 서울대에 합격한 뒤 등록을 포기한 학생의 비율은 2018년 5.7%, 2019년 5.5%로 2020년 입시보다 더욱 높았다.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에 못 들어가면 아예 재수를 하여 다음해에 의대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의대만을 목표로 하는 재수생들은 해마다 늘어 최근 몇년간 SKY대학(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의대 진학 가능한 성적을 거둔 자연계 학생 중 재수생이 절반을 넘었다. 의대·치대 들어가기 위해 재수는 필수이고 삼수는 선택이다.


◆1970년대까진 공학계열이 인기

수험생들에게 서울대라는 ‘브랜드’보다 의대가 더 선호된 것이 그리 오래지는 않았다. 국내 최초로 대규모 공업단지가 건설된 1960년대엔 서울대 공대가 가장 인기였다. 의대, 치대, 약학대학보다 합격선이 높았다. 중화학공업이 적극 육성되면서 화학공학과와 섬유공학과 등을 졸업한 학생들의 취업이 가장 잘되고 연봉도 높았기 때문이다.


1962년에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총 7차에 걸쳐 1996년까지 시행됐다. 세계 최하위권이던 1인당 국민소득이 수출주도형 산업을 중심으로 외화를 벌어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빠르게 증가해 오늘날 한국이 세계 상위권 국가로 올라서는 바탕이 됐다. 제조업 육성을 위한 경제개발에 정부 투자의 초점이 맞춰져 공대의 인기는 오랜 기간 이어졌으며 공대 졸업 후 산업체에서 일한 사람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끌어 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기름을 팔아 큰돈을 벌어들이는 중동 국가에서 건설 붐이 일면서 기계공학과, 건축공학과, 토목공학과 등의 인기가 크게 올랐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던 시절에 전국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 경기중학교의 3학년 학생들을 상대로 장래희망을 조사한 결과에 1위가 엔지니어였다. 2위가 법관, 3위 사업가, 4위 외교관 순이고 의사는 하위권에 머물렀다. 수재들이 청소년 시절부터 엔지니어를 꿈꾸며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이 제조업 강국으로 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80년대에는 전자산업이 태동해 전자공학과가 최고 인기학과가 됐다.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많은 사람의 반대에도 반도체산업에 대규모로 투자한 뒤 전자공학과 졸업생들의 일자리가 많아지고 연봉이 높아졌다. 입시사정표 순위에서 서울대의 전자공학과, 기계공학과를 비롯한 자연계열 상당수 학과가 연세대 및 고려대의 의대(의예과)보다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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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는 IT산업 발전으로 컴퓨터공학과의 인기가 급부상해 한때 1위를 차지했다. 수험생 대학 진학지도에서 서울대 공대의 컴퓨터공학과, 전자공학과, 의대(의예과)가 비슷하게 평가됐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치의 고민도 없이 의대를 선택하는 지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의대가 없는 포항공대(현재의 포스텍)와 카이스트도 전국 대학의 웬만한 의예과보다 커트라인이 높았다.

90학번의 서울공대 및 의·치대, 연대공대 및 의·치대 학력고사 점수를 비교해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공대 인기학과는 의·치대보다 들어가기 힘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서울공대 90학번 학력고사(340점 만점) 평균점수는 제어계측공학(311), 컴퓨터공학(308) 순이었으며 화학공학(307), 전자공학(307), 항공우주공학(307)이 서울대 의대(307)와 나란히 위치했다. 그 다음 기계공학(306), 전기공학(305), 도시공학(305), 무기재료(304), 산업공학(304), 원자핵공학(304), 건축학(302), 금속공학(302) 순이었다. 서울대 치대(300)는 그 아래였다. 연세대도 비슷해 전자공학(296), 컴퓨터공학(295)이 의대(294), 치대(289)보다 높았다.

◆외환위기 이후 평생직업 추구

명문대 공대와 지방대 의대의 역전 현상은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나타났다. 대기업이 부도나고 평생직장으로 인식하던 일터에서 사람들이 쫓겨났다. 평생직장이 아닌 평생직업을 추구하게 되면서 정년 없이 일할 수 있는 의사와 약사, 그리고 정년퇴직 후 연금 받는 초등학교·중고등학교 교사가 유망직업이 됐다. 카이스트 다니다가 휴학하고 다시 수능공부를 해 의대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나타났다. 또한 서울공대, 카이스트, 포스텍 등을 졸업한 뒤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의사가 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의료계는 평생 돈을 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입도 매우 높다. 과거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 후 연구원의 연봉이 의사보다 높았다. 과학기술 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부에서 과학자들을 우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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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이공계 학위를 취득하고 대기업에 취업하면 상당히 높은 연봉을 받지만 의사보다는 못하다. 고소득 전문직 중에서 변리사,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등에 비해 의사가 평균적으로 더 높은 연봉을 받는다. 어느 국가, 어느 시대든 돈 많이 버는 직업일수록 선호도가 높은 것은 당연하다.

직업의 만족도도 의사들에게서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한국고용정보원이 2019년 4월에 발표한 ‘2017 한국의 직업정보’에 따르면 직업만족도 순위에서 이비인후과의사(2위), 성형외과의사(3위), 내과의사(4위), 치과의사(5위)가 판사(7위), 기업고위임원(25위), 검사(30위)보다 높았다.

30위권에 마취병리과의사(11위), 산부인과의사(12위), 일반의사(13위), 외과의사(14위), 방사선과의사(15위), 비뇨기과의사(20위), 피부과의사(21위), 안과의사(23위), 가정의학과의사(26위), 한의사(27위)까지 포함해 총 14개나 들어있다. 교육 분야도 교육계열 교수(1위), 중고등학교 교장 및 교감(6위), 초등학교 교사(9위) 등 순위가 높았다.

◆4차산업 분야서는 공학계가 선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은 2019년 12월에 ‘2017~2019년 직업지표 조사’(1만6169명 설문)를 통해 현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높은 점수를 부여한 상위 20개 직업을 발표했다. 여기에서도 의약분야 재직자의 직업 평가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상위권을 한의사(1위), 일반의사(2위), 약사·한약사(3위), 전문의사(4위), 수의사(5위), 치과의사(6위)가 몽땅 차지했다. 판사 및 검사(18위)보다 훨씬 높았고 또 다른 고소득 전문직인 변호사(9위), 변리사(14위), 세무사(15위)보다 높았다.

그 외에 응용소프트웨어 개발자(8위), 가스·에너지 기술자 및 연구원(10위), 로봇공학 기술자 및 연구원(12위) 등이 높은 순위에 올랐다. 이러한 직업에 필요한 전문성을 교육받는 컴퓨터공학과, 화학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전자공학과 전공자의 현직 평가가 높게 나오는 것을 보면 대입 합격선에서는 공대가 의대에 밀리게 됐지만 여전히 만족도가 상위인 직업에 진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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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방송에 출연한 A씨는 서울공대와 지방의대에 동시 합격했는데 고민 끝에 서울공대를 선택해 현재는 대기업 연구원으로 신제품을 개발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에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다시 수험생으로 돌아가도 역시 공대를 선택하겠다고 한다. 한편 A씨의 고등학교 친구인 B씨도 서울공대에 합격했지만 물리가 싫고 생물에 관심이 많아 의대를 선택해 지금 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B씨는 다시 수험생으로 돌아갔을 때 지금처럼 연봉을 더 많이 받게 되는 의대를 선택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삶의 만족도를 지배하는 요소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대학배치표의 점수에 맞춰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 반드시 인생의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새로운 기술시대를 열어가는 4차산업 분야에서 공학자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

인공지능(AI)이 전통적인 직업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고 4차산업의 발달이 의·약학계열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의료서비스시장 개방과 대규모 의료인력 배출도 고려할 요소다. 사회구조의 변화와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는 인기학과 판도에 앞으로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33호(2020년 2월25~3월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