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닐라 상원 건물 앞에서 이혼 합법화를 지지하는 이들이 데모를 하고 있다. 손에 든 팻말에는
필리핀 마닐라 상원 건물 앞에서 이혼 합법화를 지지하는 이들이 데모를 하고 있다. 손에 든 팻말에는 "이혼은 인권이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2023.02.14 ⓒ AFP=뉴스1 ⓒ News1 권진영 기자


(서울=뉴스1) 권진영 기자 = 배우자에게 폭력과 학대를 당해도 이혼할 수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인구의 80% 이상이 가톨릭교를 믿는 필리핀이다.


AFP통신은 종교와 맞물린 가부장적 구조 때문에 극단적 선택에까지 내몰리는 필리핀의 현실을 31일 보도했다.

필리핀은 바티칸 이외의 지역에서 이혼이 불법인 유일한 국가다. 주류 종교인 가톨릭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다. 정치인들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해 종교계와 대립하는 일을 경계하고 있다.


이런 법적 한계 때문에 원치 않는 결혼을 한 사람이나 배우자에게 폭력 및 학대를 당하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쉽사리 부부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있다.

혼인을 무효화할 수는 있지만 소송에는 수년이 걸리는 데다 정부가 이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비용도 많이 든다. AFP에 따르면 빈곤에 시달리는 곳에서는 소송 비용이 1만 달러(약 1300만 원)이상 들 수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소송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법이 없다는 점을 악용한 온라인 사기도 발생하고 있다. 한 피해자는 혼인 무효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사기에 넘어가 2400달러(약 318만 원)을 잃었다. 해당 피해자는 이혼이 가능한 이슬람교로 개종을 고려 중이다.


부모의 강요로 시작한 결혼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11년 동안 투쟁한 시봉가 씨(45)는 "고통과 학대를 경험한 우리가 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하소연했다.

시봉가 씨는 2012년부터 남편의 '정신적 무능력'을 주장하며 혼인을 무효화하기 위한 법적 싸움에 나섰다.

남편과 갈라서기까지는 5년의 시간과 3500달러(약 464만 원)가 들었다. 코트라에 따르면 필리핀의 하루 평균 최저 임금은 570페소(약 1만3460 원) 수준이다.

하지만 시봉가 씨의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2019년 법무장관실이 시봉가 부부의 혼인 무효화에 대해 항소했기 때문이다. 필리핀 법무장관실은 정부의 법정대리인으로 결혼제도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시봉가 씨는 항소심에서 판결을 번복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직 답변받지 못한 상태다.

필리핀의 민심은 점점 이혼을 합법화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2005년 실시한 이혼 찬반 여론조사에서는 43%가 찬성하고 45%가 반대한 반면, 2017년에는 53%가 찬성했다.

의회에서도 변화 기류가 감지된다. CNN에 따르면 필리핀 하원은 지난 3월21일 이혼을 대체할 수 있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앞서 2018년에도 하원에서 여야가 이혼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상원에서 좌절됐다.

법안을 발의한 에드셀 라그먼 하원의원은 "이혼을 합법화하면 여성과 자녀가 학대를 일삼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의 가톨릭은 완고하다. 주교회의 제롬 세실라노 신부는 필리핀이 "전통적인 결혼 개념을 고수하는 유일한 국가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세실라노 신부는 "학대하는 배우자와 이혼하면 가해자가 다음 파트너를 계속 학대할 것이기 때문에 폭력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가정 폭력범을 종교적으로 어떻게 처벌할지에 대한 대안은 내놓지 않았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당선 전에는 이혼을 허용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여전히 남편과 헤어지지 못한 사봉가씨는 남편 때문에 두 번이나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적이 있다며 이혼이 허용될 때까지 자녀들은 결혼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저처럼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며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