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진의 웨이투고] 살아있으니까, '판타 레이'!
조민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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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고대 로마 공중목욕탕 소리에 꽂혀 있다. 읽고 쓸 때, 그러니까 집중해서 일할 때 '작업 ASMR'로 삼고 줄곧 틀어놓는다. 유튜브에서 '로마 목욕탕 ASMR'이라고 치면 몇 시간씩 녹음된 물소리 영상이 수두룩하다. 이른바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집중을 돕는다는 백색소음인데 영상 배경이 고대 로마다. 우윳빛 대리석으로 꾸며진 웅장한 건물에서 목욕이라니, 컴퓨터그래픽 이미지인 줄 뻔히 알면서도 초반 몇 분쯤은 늘 화면에 넋을 놓게 된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가 그렸던 로마 목욕탕 그림이 3차원으로 되살아나는 느낌이랄까. 19세기 영국 빅토리아시대에 활동했던 알마 타데마는 고대 로마 풍경에 관심이 깊었다. 당시 시민들의 사교장이기도 했던 공중목욕탕(예를 들면 '카라칼라 욕장', 1899년)도 그렸는데 은은한 대리석으로 장식된 욕장의 화려한 분위기를 실감케 한다. 위생을 중시한 로마인들은 목욕을 좋아했다고.
로마 목욕탕 ASMR 영상을 자주 틀었더니 유튜브 알고리즘이 옛날 동네 목욕탕 ASMR도 자꾸 추천한다. 그러니까 추억 속 우리 대중목욕탕 소리다. 눈치챘겠지만, 본질적으로 고대 로마 것과 같은 콘텐츠다. 욕탕 이미지가 화려한 대리석에서 소박한 타일 벽면으로 바뀌었을 뿐 결국 물소리 ASMR이다. 어렸을 적에 엄마 따라 대중목욕탕에 다녔던 나에겐 그야말로 추억을 부르는 콘텐츠, 역시 좋다. 따뜻한 탕 속에 들어앉아 시원한 초코우유를 마시면서 극강의 포근함을 느꼈던 시절이었는데…….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무지 아쉽다. 영상을 틀어놓고 할 일을 한다. 소리만 들으면 고대 로마나 1980~90년대 우리나라나 목욕탕 물소리는 거기서 거기이다.
이쯤에서 예기치 않은 사색을 한다.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물이 흐르기 때문이라는 생각. 고여 있는 물에서 소리가 날 리 없다. 결국 물이 '흐르는' 소리에 편안해지고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판타 레이'(Panta Rhei), "모든 것은 흐른다"고 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그래서 위안을 주나 보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같은 강물에 결코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했던 그는 만물(萬物)이 끊임없이 변함을 꿰뚫었다. 만물 안에는 몸의 70%가 물로 이뤄진 우리도 포함된다. 실제로 겉으로 보이는 피부 표피세포 수명은 대략 한 달이고, 몸 전체 세포도 1년이면 거의 모두 새롭게 바뀐다고 한다. 직·간접 경험에 따른 정신적 변화 역시 자연스러운 일. 알고 보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달라지고 있는 거다. 물도 흐르고 나도 변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은 그래서 관대하고 풍요롭다. 모든 가능성을 허락한다.
집중해 일한다면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노력하려고 종종 ASMR을 찾는다. 하지만 뭘 하든 힘든 마음으로 애면글면 노력하고 싶진 않다. 즐기며 정성을 쏟고 싶다. 힘 빼고 노력하기. 그러려고 판타 레이를 되새긴다. 살아있는 모든 건 흐르고 변한다니, 매사 변화를 수긍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면 비로소 편안해진다.
물 흐르는 소리가 좋다. 이 글을 쓰는 내내 고대 로마 사람들이 목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혹시 모르지 않을까? 그 시절 그곳에 또 다른 내가 있었을지도. 물론 30년 전쯤 옛날 목욕탕엔 분명 그때의 내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과 또 다르다. 흐르는 물처럼, 역사도 흐르고 추억도 흐른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오늘도 판타 레이!
조민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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