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4월15일 암상을 당한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사망했다. 사진은 지난 2022년 5월29일 미국 워싱턴DC에 위치한 링컨 기념관의 링컨 동상 모습. /사진=로이터
1865년 4월15일 암상을 당한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사망했다. 사진은 지난 2022년 5월29일 미국 워싱턴DC에 위치한 링컨 기념관의 링컨 동상 모습. /사진=로이터


1865년 4월15일.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사망했다. 전날(14일) 암살자의 총에 맞은 후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남북전쟁이라는 국가 위기 속에서도 연방을 보존하고 노예제를 폐지했던 링컨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특히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링컨 대통령은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발언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큰 울림을 던졌다.

남북전쟁부터 노예제 폐지까지… 미국 역사를 만든 링컨

링컨은 1832년 미국 일리노이주 의회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사진은 1865년 2월 링컨 대통령의 모습. /사진=로이터(국립초상화갤러리)
링컨은 1832년 미국 일리노이주 의회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사진은 1865년 2월 링컨 대통령의 모습. /사진=로이터(국립초상화갤러리)


미국 켄터키 농장 출신인 링컨은 1832년 미국 일리노이주 의회 선거에 출마했다. 그의 첫 시작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첫 의회 선거에서 낙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선 2년 뒤인 1834년 일리노이주 주의원으로 당선된 링컨은 이때를 시작으로 정치계에 입문했다. 주의원을 시작으로 링컨은 1846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1860년 11월6일 16대 미국 대통령이 됐다.


링컨은 1858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시 현역 의원이었던 스티븐 더글러스와 경쟁했다. 이때 링컨과 더글러스는 노예 제도를 가지고 논쟁했다. 당시 링컨은 "분열된 집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연설로 노예 제도로 대립하던 미국인의 단결을 호소했다. 링컨이 낙선하고 더글러스가 상원의원에 재선됐지만 더글러스와의 논쟁 때 노예 제도를 "악의 제도"라고 비판했던 것이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노예 제도 반대론자'라는 인식이 생겼다.

이는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큰 영향을 미쳤다. 1860년 11월6일 16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링컨에 대해 미국 남부에서는 '노예 제도 반대론자가 대통령이 됐다'며 위기감을 표했다.


미국 남부는 링컨 대통령 당선에 연방에서 탈퇴했다. 1860년 12월20일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처음으로 연방 탈퇴를 선언했고 그 뒤로 6개 주가 1861년 1~2월 연방에서 탈퇴했다. 1861년 2월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 7개 주의 대표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모여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1862년 3월4일 대통령에 취임한 링컨은 지속적으로 남부와 협상을 벌였으나 결국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미국 역사의 중요한 축인 남북전쟁은 1861년 4월12일 섬터요새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화됐다. 1862년 9월19일 앤티텀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리했다.


앤티텀 전투에서 승리한 링컨 대통령은 1863년 1월1일 노예 해방 선언문을 공표했다. 이후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 중이던 1864년 민주당 내 전쟁 지지 세력과 함께 국민연합당을 창당한 뒤 재선에 도전해 성공을 거뒀다. 당시 부통령 자리에는 민주당 출신인 앤드루 존슨이 올랐다.

링컨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뒤 남북전쟁은 1865년 4월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가 함락되면서 사실상 종전됐다.

남부 지지자의 암살 시도에 세상 떠난 링컨 대통령

1864년 4월11일 링컨 대통령은 포드 극장에서 남부 지지자였던 존 윌크스 부스가 쏜 총에 맞았다. 사진은 영화 '링컨' 속에서 극장에 방문한 링컨 대통령의 모습. /사진=영화 '링컨' 스틸컷
1864년 4월11일 링컨 대통령은 포드 극장에서 남부 지지자였던 존 윌크스 부스가 쏜 총에 맞았다. 사진은 영화 '링컨' 속에서 극장에 방문한 링컨 대통령의 모습. /사진=영화 '링컨' 스틸컷


1864년 유명 배우이자 남부 지지자였던 존 윌크스 부스는 링컨 대통령을 인질로 잡아 남부 포로를 석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864년 4월11일 링컨 대통령이 흑인에게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연설하자 화가 난 보스는 그를 암살할 마음을 먹었다.

링컨 대통령 부부가 포드극장에 간다는 사실을 안 부스는 공범들과 함께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과 서기 윌리엄 H. 세이워드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1865년 4월14일 링컨 대통령은 경호원 없이 연극 '우리 미국인 사촌'을 관람했다. 기회를 노리던 부스는 10시13분 링컨 대통령 바로 뒤에서 머리를 겨눠 치명상을 입혔다.

군의관 찰스 리얼은 링컨 대통령의 부상을 치명상으로 진단했다. 링컨 대통령을 포드극장 길 건너에 있던 양복점 피터슨 하우스로 옮겼지만 9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고 4월15일 오전 7시22분 사망했다.

링컨 대통령을 암살했던 부스는 1865년 4월24일 버지니아의 개럿 농장에서 붙잡혔고 같은 해 4월26일 사살됐다.

암살 이후 당시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이 제17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링컨 대통령의 시신은 그의 고향인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옮겨진 후에 오크리지 묘지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