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벤처·스타트업 생태계를 활성화하려면 인재 육성부터 AI 인프라 구축, 정책 개혁까지 정부 차원의 전방위적인 대응이 시급하다. 그래픽은 각국이 보유한 인공지능(AI) 유니콘 기업의 수. /그래픽=김성아 기자
한국의 벤처·스타트업 생태계를 활성화하려면 인재 육성부터 AI 인프라 구축, 정책 개혁까지 정부 차원의 전방위적인 대응이 시급하다. 그래픽은 각국이 보유한 인공지능(AI) 유니콘 기업의 수. /그래픽=김성아 기자


[S리포트] ④한국 벤처, 골든타임은 지금… AI 슈퍼사이클 놓치면 끝난다



한국의 벤처·스타트업 생태계가 글로벌 경쟁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산업이 급성장하며 벤처캐피털(VC) 투자가 확대되고 있지만 한국의 글로벌 벤처 투자 유치는 지속 감소하는 추세다. 특히 AI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기업) 기업이 단 한 곳도 없는 현실은 국내 스타트업이 혁신과 성장 동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벤처·스타트업 생태계를 활성화하려면 인재 육성부터 AI 인프라 구축, 정책 개혁까지 정부 차원의 전방위적인 대응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글로벌 회계·컨설팅 기업 KPMG가 분석한 2024년 연간 글로벌 VC 투자금액은 전년 대비 5% 증가한 3683억달러(약 532조4900억원)를 기록했다. 특히 지난해 4분기 글로벌 VC 투자금액은 1086억달러(약 156조97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33% 증가했다. AI 모델, 인프라 등 AI 관련 기업에 대규모 투자가 이뤄진 덕분이다. 반면 한국의 글로벌 벤처 투자 유치는 지속 감소하는 추세다. 2021년 1조원에 육박하던 글로벌 벤처 국내 투자액은 2023년 2318억원으로 2년 만에 4분의1 수준으로 급감했다.

한국 벤처·스타트업 업계가 AI 패러다임 변화 흐름에서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점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중국정보통신원의 '2024 글로벌 디지털경제 백서'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는 AI 유니콘 기업이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124개), 중국(71개)은 물론이고 한국과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비슷한 일본과 대만에도 유니콘 기업이 있음을 고려하면 초라한 성적표다.


지난 10년 동안 국내에 등장한 유니콘 기업 대부분은 이커머스, 가상자산 거래소 등 내수 기반 서비스 업종에 편중됐다. ▲두나무(가상자산 거래소) ▲직방(부동산 중개 플랫폼) ▲컬리(신선식품 배송) ▲당근마켓(중고거래 플랫폼)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커머스 산업에도 기술력이 전제돼 있지만 글로벌 확장성에는 한계가 있다.

향후 AI 분야에 VC 투자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한국의 벤처 생태계를 활성화하려면 AI 기반의 벤처·스타트업을 육성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도영 삼정KPMG 스타트업 지원센터 파트너는 "올해는 AI가 VC의 주요 투자 분야로 자리할 것으로 예측된다"며 "특히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의 등장은 글로벌 AI 경쟁을 심화시켜 국내·외 기업과 투자자들의 AI 관련 투자 움직임이 한층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AI 인재 확보, 산·학 협력 강화 함께 이뤄져야

AI 벤처·스타트업 육성의 핵심은 인재 확보에 있는데 업계에서는 인재 양성을 위해 정부 차원의 투자를 대폭 확대하고 AI 인재를 효과적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산·학 협력 체계 강화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하게 제작한 이미지. /이미지=챗GPT
AI 벤처·스타트업 육성의 핵심은 인재 확보에 있는데 업계에서는 인재 양성을 위해 정부 차원의 투자를 대폭 확대하고 AI 인재를 효과적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산·학 협력 체계 강화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하게 제작한 이미지. /이미지=챗GPT


AI 벤처·스타트업 육성의 핵심은 인재 확보에 있다. 딥시크가 비교적 적은 개발비로 세계적 수준의 AI 모델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중국 내 풍부한 AI 인재 덕분이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은 인재를 지키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AI 인재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은 해외 기업들보다 경쟁력 있는 보상을 제공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삼성전자의 경우에도 동일한 직무에 대해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은 처우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에서는 인재 양성을 위해 정부 차원의 투자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올해 핵심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1조원을 배정했는데 이는 2023년(8000억원) 대비 20% 증가한 수치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등 AI 선도국과 비교하면 최대 20배 이상 차이가 나는 등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다. 김명주 AI안전연구소장은 "우수한 AI 인재에게는 파격적인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며 "국내 인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외 AI 전문가와 한국 출신 글로벌 인재를 적극 유치하고 이들과 협력해 연구·교육을 강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계 주요국들은 AI 인재 확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 미국의 2025년 연방 연구개발(R&D) 예산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올해 국립과학재단(NSF) R&D 관련 예산에만 81억달러(약 12조원)를 배정했다. 이 중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교육 프로그램에 13억달러(약 1조9000억원), 반도체지원법(칩스법)에 따른 인재 양성 지원 예산, 국방부의 AI·사이버보안 관련 인재 양성 프로그램 등을 포함해 연간 최대 140억달러(약 20조4000억원)를 인재 육성에 투입한다.

중국은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1조위안(약 200조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중 연간 약 7조4000억원을 AI 인재 확보에 투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역시 2021년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새로운 자본주의' 계획을 발표하며 3년 동안 4000억엔(약 3조7615억 원)을 인재 양성에 투자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AI 인재를 효과적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산·학 협력 체계 강화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미국은 기업 주도, 중국은 정부 주도의 산학 협력을 통해 AI 인재 양성과 기술 개발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기업이 자체 연구소를 운영하며 기술을 개발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어서 산·학 협력의 효과가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일부 대학에서 AI 전문 대학원과 협동 과정을 개설하는 등 AI 특화 교육 트랙을 확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기업이 요구하는 최신 AI 기술과의 연계성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조주현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원장은 "한국은 대학과 산업계의 접점이 부족해 기업들이 필요한 기술을 대학에서 찾기 어려운 구조"라며 "산학 협력은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수적인데 장기간 경기 침체와 국내외 경제·정치적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기업들이 R&D 비용을 줄이면서 협력의 기회도 감소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부"올해 고성능 GPU 1만5000장 확보" vs 업계 "지금 당장 필요한 수준으로 여전히 미흡"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4일 연내 국가 AI 컴퓨팅센터에 고성능 GPU 1만5000장을 확보하겠다고 발표했지만 AI 기술 격차를 따라잡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지난 4일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5년도 과기정통부 핵심과제 추진현황 브리핑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4일 연내 국가 AI 컴퓨팅센터에 고성능 GPU 1만5000장을 확보하겠다고 발표했지만 AI 기술 격차를 따라잡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지난 4일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5년도 과기정통부 핵심과제 추진현황 브리핑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AI 인프라 문제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AI 기술을 연구·개발하고 실제 산업 현장에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연산 능력(컴퓨팅 파워)과 데이터 저장·처리를 위한 인프라가 필수적이다. 지금껏 한국은 대기업 일부를 제외하면 중소·벤처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공용 인프라가 부족해 AI 스타트업들이 성장하기 어려웠다.

한국이 보유한 H100 그래픽처리장치(GPU)는 약 2000장 수준으로 글로벌 AI 선도 기업들과 비교했을 때 턱없이 부족하다. 포브스 등에 따르면 ▲메타 35만장 ▲xAI 10만장 ▲테슬라 3만5000장 ▲아마존웹서비스(AWS) 3만장 ▲구글 2만6000장을 보유하고 있다. 최병호 고려대 인공지능연구소 교수는 "대학들이 보유한 GPU는 대부분 저사양이며 최신 AI 연구에 필수적인 엔비디아 H100 시리즈는 가격이 비싸 쉽게 확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한정된 고성능 GPU를 여러 프로젝트와 정부 과제, 연구에 나눠 사용해야 해 기술 개발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4일 연내 국가 AI 컴퓨팅센터에 고성능 GPU 1만5000장을 확보하겠다고 발표했지만 AI 기술 격차를 따라잡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글로벌 AI 기업들은 자체 AI 슈퍼컴퓨터를 구축해 압도적 격차를 벌리고 있다. 최병호 교수는 "AI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 1만장의 GPU는 지금 당장 필요한 수준"이라며 "올해를 넘기면 한국은 미래 AI 산업에서 도태될 위험이 크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이 밖에도 국내 벤처·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 보다 과감한 제도 개선과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구체적으로는 ▲전력망 확충법 도입 ▲퇴직연금의 벤처 투자 활용 허용 ▲일반 투자자가 비상장 벤처기업에 간접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기업성장집합투자기구(BDC) 도입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규제 완화 등이 핵심 과제로 지목된다.

AI 슈퍼사이클이 도래하면서 글로벌 기술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국내 벤처·스타트업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과감한 정부의 지원과 정책 개혁이 필수적이다. AI 산업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수십조원 규모의 대규모 자본 투자가 필연적이어서 정부의 지원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조주현 원장은 "정부의 지원이 뒷받침되면 한국의 벤처·스타트업들이 보다 창의적이고 공격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며 "세계 모두가 AI에 집중하는 가운데 올해 AI 분야에 대해서는 전폭적인 투자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