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때 찬란했던 한국 영화계가 양적, 질적 모두에서 큰 위기에 빠진 모습이다. 극장을 찾는 관객은 현저히 줄었고, 해외 영화제 수상 소식도 좀처럼 들려오지 않고 있다. 올 들어 5월 중순까지 300만 관객을 넘긴 한국영화는 단 1편뿐이다. K무비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탔던 칸 국제영화제에서 올해까지 최근 3년 연속, 경쟁 부문에 단 한 편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뉴스1은 총 5편의 기획 시리즈 [위기탈출 K무비]를 통해 한국 영화계의 현실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 해결 방안도 모색해 보고자 한다.
ⓒ News1 윤주희 디자이너
"영화가 없다."
(서울=뉴스1) 고승아 정유진 장아름 기자 = 지난해 말부터 영화계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다. 대형 투자배급사에서 제작되는 영화 편수가 줄었고, 그에 따라 극장에서 상영될 한국 영화도 적어질 것이라는 내용의 이 괴담은 결국 사실로 판명 났다. 팬데믹 이후 이어진 위기로 인해 K무비는 '제작 절벽'이라는 위기와 맞닥뜨렸다.
◇ 잘 되는 작품만 잘 된다…제작비는 대폭 상승 vs 수익률은 크게 하락
2025년 개봉작 중 이달 18일까지 300만 관객(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을 돌파한 한국영화는 4월 16일 베일을 벗은 강하늘 유해진 박해준 주연의 '야당'(320만 9570명) 1편뿐이다. 올해도 극장가에 위기가 지속되고 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봉준호 감독이 연출을 맡은 '미키17'도 301만 3440명을 나타냈지만, 이 작품은 제작 시스템상 미국 국적 영화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올해 2월 발표한 '2024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영화 총 누적 관객 수는 7147만 명이다. 2023년보다는 17.6%(1072만 명) 증가했으며, 매출액도 6910억 원으로 15.5%(925억 원) 늘었다. 지난해 '파묘' '범죄도시4' 등 두 편의 천만 영화와 '파일럿' '베테랑2' 등의 활약이 컸다. 하지만 여전히 팬데믹 이전인 2019년의 총관객 수 1억 1562만 명과 매출액 9707억 원에는 크게 못 미쳤다.
제작 및 개봉 편수도 줄어들었다. 저예산 영화와 중·대예산 작품의 구분점 중 하나가 되는 순수 제작비 30억 원 이상의 상업영화는 지난해 총 37편 개봉했다. 2019년의 45편보다 감소한 수치다. 그나마, 지난해에는 팬데믹 이전 촬영한 후 뒤늦게 개봉한 이른바 '창고 영화'가 포함됐기에 30여 편의 상업영화가 관객들과 만났다. 하지만 올해 들어 '창고 영화'도 거의 소진된 상태이기에 개봉 영화는 더욱 줄어들고 있다. 국내 최대 배급사 중 한 곳인 CJ ENM이 2025년 선보일 영화가 단 3편인 점도 제작 및 개봉 편수 감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순제작비 30억 원 이상의 상업영화 추정 수익률 역시 마이너스다. 지난해 37편의 평균 추정 수익률은 -16.44%를 나타냈다. 2023년 평균 수익률 -30.98%보다는 나아졌지만, 2019년 10.93%에 비하면 현저히 낮다.
37편 중 손익분기점(총매출 기준)을 넘긴 영화는 10편(27%) 정도다. 그중 수익률 100% 이상을 기록한 영화는 3편뿐이다. 수익률 -80%도 하회한 작품은 13편으로, 이는 한국영화 수익성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해 한국영화 완성작 수출 총액도 4192만 8570달러(약 584억 원)로 전년 대비 32.5% 하락했다. 수출 편수가 대폭 감소하면서 양적인 면에서 해외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영화가 부족했고, 이것이 계약 감소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반면 제작비는 큰 폭으로 상승했다. 상업영화 37편의 총제작비 총합은 4260억 원으로, 편당 평균 총제작비는 115.1억 원을 기록했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 기준 상업영화 45편의 편당 평균 총제작비는 101.3억 원이었다.
제작비 상승의 주요 원인으로는 톱배우 출연료를 비롯해 스태프 인건비 상승, 주 52시간 근무제로 길어진 촬영 일수 등이 꼽힌다. 특히 높은 출연료와 VFX(시각특수효과) 기술로 인해 증가한 인건비 등이 영화 제작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결과적으로 영화의 손익분기점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영화 '야당 '포스터
◇ 극장 떠난 관객들…이유는
극장 관객 수 하락의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티켓 가격 상승이다. 2022년부터 티켓값은 1만 5000원 선을 유지하고 있다. 이전보다 높아진 영화 푯값으로 인해 관객들은 통신사나 카드사 할인, 초대권 등 할인된 가격이 아니면 극장 방문을 꺼리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상승한 티켓값과 맞물려, 관객들은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명확히 구분하기 시작했다. 결국 흥행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했고, 웬만한 작품들은 손익분기점을 달성하기조차 어려워진 상황이다.
팬데믹 기간 급성장한 OTT(Over The Top)의 영향도 크다.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 글로벌 OTT와 티빙, 웨이브 등 국내 OTT는 극장에서 1편의 영화를 보는 가격보다 싼 금액에 매달 다수의 영화를 시청자들에 제공하고 있다. 이에 영화관 대신 '안방극장'을 택하는 이들이 증가했다.
OTT로 인해 IPTV VOD 시장 역시 크게 위축됐고, 그에 따라 제작사 및 투자배급사가 가져올 수 있었던 부가 판권 수입도 감소했다. 극장-TV VOD-OTT-TV 채널로 이어지는 기존 '홀드백'(극장 개봉작의 일정 기간 기타 매체 상영 금지) 과정 중 TV VOD에서 OTT로 넘어가는 과정이 짧아져 TV VOD의 입지가 약화한 것이다.
다양한 통로에서 수익은 줄어드는 가운데, 제작비의 상승 역시 투자를 위축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유통사인 극장에 돈이 안 돌고 있다, 돈이 돌아야 정산이 돼 투자사로 넘어가서 영화를 만드는 동력이 생기는데 그게 안 되다 보니까 투자배급사에 회수가 안 되고 투자를 안 한다"며 "대기업 투자배급사도 돈이 없으니, 투자를 못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시내 한 영화관 / 뉴스1 ⓒ News1 김성진 기자
◇ 악순환의 고리
주요 배급사 CJ ENM,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NEW,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등이 올해 공개하는 영화의 편수는 이전과 비교할 때 확연하게 줄었다. 코로나19 이전 업계 1위를 달렸던 CJ ENM은 올해 박찬욱 감독 '어쩔 수가 없다', 이상근 감독의 '악마가 이사왔다'와 글로벌 프로젝트인 '지구를 지켜라!'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부고니아' 등 3편만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관객과 마찬가지로 투자배급사도 해당 작품으로 얼마나 수익을 올릴 수 있을지 더 계산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개봉 편수가 줄어들고 있다"라며 "작은 규모라도 볼 만한 작품, 혹은 비용이 들더라도 확실하게 큰 작품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이어 "검증된 것만 하려는 분위기라 투자 단계에서 작품을 검토할 때 이전 연출작과 스코어, 제작사, 시나리오 디벨롭이 가능한지 등을 다 보고 결정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코로나19가 촉발한 관객 감소, 티켓 가격 상승, OTT 플랫폼의 급성장, 제작비 및 출연료 급등, 검증된 IP와 감독·배우에 쏠리는 투자 등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제작 절벽'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관객 수의 급감은 한국영화 수익률의 하락으로, 수익률의 하락은 제작 편수 감소로, 제작 편수 감소는 관객들에게 '극장에서 볼 영화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악순환의 고리가 강화되는 경향도 보인다. 이에 향후 시장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과 혁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