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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허남영 스포츠부 부국장 = 한국 여자배구가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퇴출당했다.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최근 국내외 스포츠 뉴스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로 꼽고 싶을 정도다.

VNL은 FIVB 주관으로 세계 18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참가해 실력을 겨루는 가장 큰 규모의 국제 대회다. 참가국끼리 경기를 치러 순위를 매기는 데, 최하위 팀은 강등돼 다음 해 VNL에 참가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올해 VNL에 출전한 18개국 중 18위, 꼴찌에 자리했다.


그게 뭔 대수냐 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VNL에는 내로라하는 세계 배구 강국들이 참가한다. VNL을 통해 각국의 실력 수준은 물론 자국 배구 대표팀의 기량을 점검해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대한축구협회가 돈 보따리 싸 들고 브라질이나 유럽 축구 강호들을 불러들여 우리 대표팀과 평가전을 갖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른 점이 있다면 VNL은 큰돈 들이지 않고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무대인데, 이번 강등으로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린 게 너무나 안타깝고 속상하다. 가뜩이나 국제 경쟁력이 떨어지는 한국 여자배구가 우물 안 개구리 신세로 전락하지 않을까 매우 우려스럽다. 2024년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여자배구는 예선 전패로 올림픽 진출 티켓을 따지 못했다. 이 상태로라면 앞으로 우리 여자 배구 선수들이 올림픽 무대를 다시 밟을 수나 있을지 조바심이 난다.

한국 여자배구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한때 아시아는 물론 세계를 호령하던 여자배구 아니던가. 올림픽에서 구기 종목 최초로 한국에 메달을 안겨준 것도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여자배구였다.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도 메달은 못 땄지만, 4강에 들 정도로 경쟁력이 있었다.


여자배구의 추락 원인을 ‘김연경’과 연결 짓는 시각들이 있다. 배구계에서도 지금의 한국 여자배구가 처한 상황을 ‘김연경 은퇴’ 전과 후로 구분한다. 김연경의 은퇴 전에 여자배구가 최고의 전성기와 인기를 누렸던 데 반해 그의 은퇴 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 김연경이 국가대표에서 은퇴한 2021년 이후로 대표팀의 국제 대회 성적이 곤두박질친 건 팩트다. 2022~2023년 가진 국제대회 29경기 중 1승 28패의 수모를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세계 랭킹도 크게 하락해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일본(4위), 중국(5위)은 물론 베트남(26위)에도 뒤처진 37위로 내려앉았다.

배구계는 비상이다. 김연경이 국가대표에 이어 지난 시즌을 끝으로 프로선수로서도 공식 은퇴하면서 김연경이라는 걸출한 스타에 의존해 온 프로 배구의 인기마저 물거품처럼 사라질까 두려워서다. 2005년 프로 V-리그가 생기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여자배구는 겨울 스포츠 중 최고의 흥행 종목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김연경이 은퇴를 미리 못 박고 선수 생활 마지막 열정을 태운 지난 시즌이 초절정이었다. 흥행 보증수표 김연경이 없는 다음 시즌을 걱정하는 배구계의 시름이 깊다.


한국 여자배구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래서 제2, 제3의 김연경 같은 유망주를 발굴해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초·중·고교 배구팀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그 여파가 대학, 실업 배구의 쇠퇴로 이어지면서 배구 생태계 자체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중병에 신음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문제들이 김연경이라는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대스타에 가려져 있었다는 한 배구계 인사의 지적은 새겨들을 만하다.

배구계 원로와 지도자들이 그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학교 배구 환경과 세대교체 등 선수 양성 시스템에서부터 현재 프로 구단 운영의 문제점들을 진정 개선 의지를 갖고 들여다봤으면 한다. 배구계 생태계를 회복하기 위해선 하루 이틀짜리 반짝 대책으로는 어림도 없다. 긴 안목을 가지고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바로잡아가야 한다. 진부한 비유지만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