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역사에는 과대평가된 사람도 있고, 정말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인데, 별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마키아벨리는 과대평가된 사람에 속한다.

그렇다고 그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다. 다만 그가 중요한 이유가 그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평범하고 궤변에 가까운 그의 작품이 이토록 큰 명성을 갖게 됐다는 사실 자체다.


필자는 타인의 저서를 평가할 때 "마키아벨리 수법을 사용했군"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놀랍게도 이런 책들이 대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 좀 안된 건 마키아벨리 자신도 전혀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흔히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하는 냉혹한 진리는 새로운 주장도 아니고, 도시국가마다 군웅이 할거하고 하극상이 난무하던 이탈리아에서는 흔해 빠진 현상이었다. 소심한 공무원이었던 마키아벨리는 현장에서 그들을 상대할 능력도 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세상을 계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주 무능하고 게으른 군주를 가르치기 위한 초보적인 교재로 저술한 것이었다. 출간할 마음도 없었다. 이 책을 읽고 자신을 등용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큰 실수를 했다. 자신이 제공하는 다양한 통치의 요령을 심오한 진리로 포장하기 위해 역사를 끌어들였는데, 위대한 군주의 일화를 제시함으로써 경쟁심을 유발해 보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괜히 어려운 논증을 하려니 논증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문제만 복잡하게 나열하고 횡설수설하다가 딴전을 피운다. 군주론은 결론만 나열하면 대단히 냉철한 책 같지만, 막상 읽어 보면 정말 읽기 어렵다. 그럴듯한 문제의식을 던져놓고 횡설수설한다.

더 큰 실수는 놀기 좋아하는 군주가 이런 책을 읽을 리가 없다는 거다. 이렇게 해서 마키아벨리의 시도는 대실패로 끝났고, 그는 우울하게 사망했다.


그가 죽고 이 책이 세상에 나오자 너무나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결론은 별로 새롭지도 않고, 내용은 어려운데 이 책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세상의 운영 원리가 교회의 교훈과 작별 인사를 하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돈과 쾌락을 추구하는데, 교회는 낡은 이론으로 사람을 구속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바티칸 교황청은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건물이었다. 신앙심은 전혀 없는 교황들과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당대의 천재들이 세상이 보지 못한 종교화와 건축을 이뤄 놓았다.

대중이 원한 건 새로운 깨달음이 아니라 당당한 선언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얼굴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 소심한 사나이를 악마 같은 냉혹한 지성을 지닌 인물로 미화하기 시작했다.

사이비 지식인 선동가들에게도 마키아벨리의 논법은 훌륭한 교사가 됐다. 그 비결을 마키아벨리의 주장 하나를 살펴보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시민정부에서 잠시 일하면서 남긴 업적, 어쩌면 자기 최고의 공로라고 자부심을 가졌던 업적이 징병제와 시민군 창설이었다.

16세기 유럽은 직업군인과 용병들의 천국이었다. 이탈리아는 용병에겐 천국 같은 곳이었다. 통일 정권이 없고 도시로 분열돼 있어서 다툼은 끊이지 않는데, 도시마다 부와 값진 예술품이 가득했다.

이탈리아도 용병 사업이 성황을 이뤘는데, 이탈리아 용병은 다른 유럽 용병에 비해서도 유달리 비싸고 무능했다. 무구는 상상을 초월하게 화려했지만, 용기나 직업의식은 엉망이었다. 승리든 패배든 용병에게는 고용 종료를 의미했다. 도시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고용주의 금고가 텅 빌 때까지 시간을 질질 끌거나 주변을 약탈했다. 도시 입장에서는 승리하든 패배하든 파산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외에도 여러 저술을 했다. 전술과 군사개혁을 다룬 글에서 그는 용병의 행태를 이렇게 비판했다. "전쟁은 도적(용병)을 만들고, 평화는 그들을 교수형에 처한다."

그는 용병을 시민군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을 돈 버는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전쟁을 맡겨선 안 된다. 진심으로 평화와 안정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피렌체의 시의원들은 그의 주장에 감동하였고, 마키아벨리에게 시민군 창설 임무를 맡겼다.

공명심이 강했던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만든 군대에 눈에 확 띄는 군복을 입혔다. 상의와 하의를 수직으로 나눠 한쪽은 흰색, 한쪽은 붉은색이었다. 발만 잘 맞는다면 퍼레이드 효과는 보장하는 디자인이었다. 병사들은 평일에는 생업에 종사하며 휴일에 훈련했다. 무보수지만 전쟁에 동원됐을 때는 용병 수준의 봉급을 받았다.

마키아벨리가 육성한 피렌체 시민군은 피렌체의 숙적이던 피사와의 전투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마키아벨리는 득의만만했다. 그의 시대를 앞서가는 지혜가 증명되는 듯했다. 그의 시민군은 유럽에서 징병제가 보편화되는 18세기에 비하면 200년이나 빨랐다.

1512년에 스페인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스페인군 8000명이 피렌체로 진군해 왔다. 당시 스페인 보병은 총병이 사격을 하고, 장창병이 총병을 보호하는 테르시오라는 협력전술과 검을 들고 근접전을 벌일 때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으로 유럽 최강의 보병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피렌체 정부는 근교의 도시 프라토에서 스페인군을 저지하기로 했다. 1만 2000명의 피렌체군이 프라토로 파견됐다. 프라토에도 약 4000명의 시민군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도 잘 남아 있는 프라토의 성벽을 이용해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스페인군은 사정이 좋지 않았다. 장거리 이동으로 식량이 거의 떨어졌고, 작동하는 대포는 1문뿐이었다. 그 대포를 쏴서 성벽 상단에 가로 4m, 세로 2m의 구멍을 하나 만들었다. 겨우 병사 2명이 사다리를 타고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었다. 그 순간 1만 명이 넘는 시민군이 그대로 도망쳤다.

시민군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가정과 재산 보호였다. 가정과 재산을 보호하려면 가장이 생명을 보존해야 했다. 그래서 피렌체 시민군은 약자에겐 강했지만 강자가 등장하면 아예 저항을 포기했다.

마키아벨리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본인은 역사에 통달하고 지혜로운 척했지만, 사물을 단순하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고의가 아니라 능력의 한계로 인해 그가 자기주장을 펴는 법은 단순했다. 그는 "용병은 전쟁을 끝내기를 원치 않는다"는 명제와 같이 단순하고 감정을 움직이는 명제를 찾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렇게 선고한다. "이것이 만악의 근원이다. 이 원인만 해소하면 훌륭한 군대가 된다."

의외로 지식인들도 이런 단순화된 논리에 잘 넘어간다. 어렵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는 전문가는 대중을 속이고 있다는 선입견이 강한 대중은 이런 단순함에 환호했다.

공감을 얻으면 마키아벨리는 역사를 끌어들인다. 이때도 단순화와 감성이라는 무기를 잊지 않는다. 진실한 분석이 아니라 자신의 단순함을 증명해 줄 사례를 찾는다.

이탈리아인을 설득하는데, 로마처럼 좋은 소재가 없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낳은 군대는 시민군이었다. 그 자리를 이민족 용병이 채우면서 로마는 혼돈에 빠지고 그들 손에 멸망했다"고 주장한다.

이건 역사 왜곡이다. 로마의 시민군은 프라토의 시민군처럼 한니발에게 박살이 났다. 팍스 로마나의 영광을 이룬 군대는 시민군을 대체한 직업군인이었다. 이들이 후손인 이탈리아 용병과 달리 최상급의 군대가 된 비결은 전문성과 확고한 직업의식이었다.

물론 이들도 시민군인 건 맞다. 그러나 시민으로 채운다고 훌륭한 시민군이 되지 않는다. 당시에도 이런 반론을 펴는 사람이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시민군을 지키기 위해 전문성의 역할을 폄하한다.

16세기에 전문군인이나 용병이 전쟁의 주역이 되고, 군인봉급이 높아진 진짜 원인은 총과 대포였다. 이때 화기는 지금 화기와 달리 대단한 숙련을 요구했다. 총과 화약이 나오면서 전술 운용이 복잡해졌고, 전문장교의 가치가 높아졌다.

마키아벨리는 총의 위력을 폄하한다. 피렌체 시민군에서 총병은 겨우 10% 정도였다. 다른 병사들은 창과 로마군을 본뜬 원형방패를 들었다. 로마의 전통을 따라 기병도 의미를 제한한다. 심지어 나중에 단 1발로 1만 시민군을 물리쳐 버릴 대포는 정말 별거 아니라고 우긴다.

그는 창이 총과 대포보다 강하다는 근거로 스위스 보병의 승전 사례를 내민다. 스위스 보병이 총을 이긴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용병, 직업군인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출신이 시민이면 시민군이란 이상한 정의를 계속 유지해서 유럽 최고의 직업군인을 농민병 취급한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공화정부를 설득한 주요 논거는 용병은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는 쿠데타 위험이 없다고 자신한다. 장교와 병사의 유대감을 해체한다는 이유로 중대장을 번개 같은 로테이션으로 돌린다. 병사들은 자기 중대장이 누군지도 모른다. 중대장은 과다하게 많고 그들 위에는 장교가 없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방법이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병력을 모집할 수 있다고 자랑했지만, 상하좌우로 유대감이 없는 시민군의 조직력은 모래알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시민군은 망했지만, 시민군의 우수성을 논증하는 궤변과 억지 논리는 살아남았다. 약삭빠른 작가들은 이것을 봤다. 사람들은 간결한 결론을 좋아하고, 단순화와 핵심요약을 착각한다.

16세기와는 비할 수 없이 복잡해진 세상에서도 복잡한 해결책은 전문가의 속임수라고 화를 내고, 일도양단의 단순한 해법이 아직도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선동가들은 이 심리를 이용한다. 덕분에 마키아벨리는 아직도 정치와 도덕을 분리한 최고의 지성, 선명한 답을 제시하는 양심적 지식인 대우를 받고, 온 세계에서 진리가 선동을 이기는 경우가 없다. 마키아벨리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도 모르고 한 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