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17일 서울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이 열렸다. 사진은 1988년 9월17일 서울에서 열린 제24회 하계올림픽 성화봉송 마지막 주자인 임춘애의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1988년 9월17일 서울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이 열렸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이다.

당시 국민에게 올림픽 개최는 크나큰 자부심이었다. 불과 30년 전까지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여파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하지만 온 국민의 노력 끝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세계 최대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을 주관하는 나라로 성장했다.


이번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닌 한국의 성장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 계기였다. 또 길었던 냉전 시대를 종식한 대회로 역사적 의미도 크다. 이번 대회는 1976 몬트리올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동서 모두가 참가한 올림픽이었다. 1980 모스크바올림픽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 다음 올림픽인 1984년 LA대회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이 보이콧하며 정치 논리에 따른 반쪽 대회가 됐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 '굴렁쇠 소년'의 감동과 비둘기 화형식

1988년 서울올림픽이 온국민에게 잊지못할 추억을 남겼다. 사진은 1988년 9월17일 서울올림픽 개최식 성화봉송 당시 성화대에 앉아있는 비둘기들의 모습. /사진=유투브 캡처


서울올림픽은 온 국민의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순간들을 선물했다. 혼성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주제가 '손에 손잡고'는 아직도 올림픽 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로 사용되고 있다.

오랜 앙숙 일본을 꺾고 개최를 확정한 것도 국민에겐 큰 기쁨이었다. 개최지 결정은 1981년 서독(현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개최기구(IOC) 총회에서 이루어졌다. 총회에서 서울은 일본 나고야를 52대27로 제치고 개최권을 따냈다.


개막식은 탄탄한 기획으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리스 아테네 올림피아에서 채화된 성화는 제주를 일주한 후 부산에 도착했다. 성화는 22일 동안 1461명의 주자와 함께 4163㎞를 달려 서울로 향했다. 하얀 한복을 입은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는 모습,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모습 등 연출도 대단했다.

일명 '비둘기 화형식'으로 불리는 대참사도 벌어졌다. 당시 개회식과 함께 날아갔던 비행기는 경기장 공중과 성화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성화 봉송은 이미 시작했고 올림픽 개회식을 보던 시청자들은 산채로 타죽는 비둘기들을 생중계로 목격했다.

종합 4등 쾌거·흑자 전환했지만… 서울올림픽의 명암

1988 서울올림픽이 흥행했지만 일부 도시빈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사진은 당시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올림픽 개회식의 모습. /사진=Antexon 유튜브 캡처


서울올림픽은 국내 유치한 행사 중 유례없는 성공을 거뒀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떨며 구소련, 구동독, 미국에 이어 4위에 올랐다. 양궁 김수녕, 탁구 유남규, 현정화, 유도 김재엽 등 스포츠 스타들도 대거 탄생했다.


무엇보다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막대한 경제효과도 봤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대회를 마친 후 2520억원에 흑자를 기록한 대회였다고 평가했다.

낙후된 서울을 재정비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서울시는 당시 아파트, 체육관, 공원 등을 대규모로 조성하며 도시 경관 개선에 막대한 돈을 사용했다. 1981년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후 7년 동안 한국이 올림픽 개최를 위해 쓴 돈은 약 2조3826억원다. 다만 생산 유발 효과는 4조7504억원으로 예상됐고 소득 유발 효과는 1조8462억원으로 파악됐다.


이 과정에서 도시 빈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기도 했다. 서울시는 도시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판자촌과 노후한 건물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도심 곳곳에서 근근이 삶을 이어가던 빈민들은 화려해진 도시 속에서 거주지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