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는 '인재가 기업을 부르고, 기업이 다시 인재를 키우는' 선순환 구조를 통해 세계 산업 지도의 핵심 입지로 부상했다.사진은 아일랜드 더블린에 위치한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Dublin)의 상징인 캄파닐레(Campanile) 종탑. 이곳은 더블린의 역사와 지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이다. 지난 9월 화창한 날씨에 학생들과 관광객들이 캠퍼스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사진=김성아 기자


"아일랜드 경제에 트럼프 쇼크는 없을 것이다."

지난 9월 아일랜드 현지에서 만난 정부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감 있게 이같이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날로 거세지는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공세로 인해 다국적 기업 유치에 의존해 온 아일랜드 경제 모델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다.


단순한 낙관일까. 전문가들은 아일랜드의 이같은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다고 평가한다. 아일랜드의 기업유치 중심 경제 모델은 단순히 '저(低)법인세'에 기대는 구조가 아니라 안정적인 조세정책과 법·제도, 고학력인구, 유럽연합(EU) 단일 시장 접근성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종합 시스템인 만큼 아일랜드를 떠나는 것이 기업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글로벌 제약회사 관계자는 "본사를 이전하는 일은 단순히 스위치를 끄고 켜는 수준의 결정이 아니라 막대한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다"며 "또 기업들은 아일랜드가 제공하는 인프라와 제도적 이점을 쉽게 포기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지식 기반 산업의 핵심 병기는 '인적 자본'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등 지식 기반 첨단 산업이 미래 성장 동력으로 부상하면서 '인적 자본'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가운데 아일랜드가 '인재 허브'로 주목된다. 사진은 가을빛으로 물든 더블린대학교(UCD) 벨필드 캠퍼스의 풍경. 학생들이 강의동 사이를 오가며 활기찬 일상을 보내고 있다. /사진=김성아 기자



특히 이 자신감의 핵심에는 '고급 인재 양성'에 사활을 건 아일랜드의 국가 전략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등 지식 기반 첨단 산업이 미래 성장 동력으로 부상하면서 '인적 자본'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탓이다. 전통 제조업이 저렴한 노동력이나 원자재 접근성을 경쟁력의 핵심으로 삼았다면 오늘날 지식 기반 첨단 산업의 핵심 생산 수단은 오직 '사람', 즉 인적 자본 그 자체다. 결국 뛰어난 인재를 확보한 국가와 지역이 세계 산업 지도의 핵심 입지로 부상하게 된다.


전 세계 브레인을 모두 빨아들인다는 중국조차 첨단 기술 분야에서 심각한 인재 기근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아일랜드는 이미 이 흐름을 읽고 국가적인 인재 전략을 가동해 양질의 인적 자원을 갖췄다. 특히 첨단 산업의 핵심인 이공계(STEM) 분야에서 두드러진 경쟁력을 보인다. 아일랜드는 20~29세 인구 1000명당 STEM 분야 졸업자가 40명에 달해 EU 평균(1000명당 23명)을 훌쩍 웃돌며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박선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런던무역관 연구원은 "아일랜드 정부의 지속적인 교육 투자와 젊은 전문 인력 양성 노력은 글로벌 기업을 끌어들이는 주요 요인"이라며 "산업이 필요로 하는 맞춤형 인재를 적극적으로 길러내는 시스템이 외국인 직접투자(FDI) 확대의 숨은 동력"이라고 짚었다.

'투트랙 전략'으로 완성한 아일랜드식 인재 생태계


아일랜드는 장기적인 국력 확보를 위해 대학과의 산학 연계 시스템을 통해 곧바로 현장에 투입 가능한 '현장형 인재'를 기르는 데 집중하는 한편, '글로벌 시티즌 2030' 전략으로 전 세계 영재들까지 포섭하는 투트랙 전략을 가동한다. 사진은 지난 9월 머니S와의 인터뷰를 진행중인 세이머스 캐럴 아일랜드투자개발청(IDA) 반도체 담당 부사장과 휴 스미디(Hugh Smiddy) 틴달 국립연구소(반도체·광전자 분야 선도 연구기관) 사업개발총괄의 모습. /사진=임한별 기자



아일랜드가 이러한 독보적인 인적 자원 경쟁력을 갖춘 배경에는 '투트랙 전략'이 있다. 첫째, 대학과의 산학 연계 시스템을 통해 곧바로 현장에 투입 가능한 '현장형 인재'를 기르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둘째, 전 세계 영재들을 아일랜드로 끌어들이기 위한 '당근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인재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정부도 아일랜드가 어떻게 주요 인재를 키우고 포섭했는지 참고할 필요가 있는 지점이다.


2020년대에 들어 아일랜드는 단순히 고학력 인구를 배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첨단 산업의 수요를 겨냥해 석·박사급의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아일랜드의 주요 대학과 연구기관들은 현장 연구개발(R&D) 수요에 맞춰 석·박사급 인력을 집중 육성하는 등 기업 친화적인 인재 양성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더블린대학교(UCD), 그리고 틴달 국립연구소(Tyndall·반도체·광전자 분야 선도 연구기관) 등이 이 시스템의 핵심 축이다.

틴달 국립연구소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매년 약 50명의 반도체 부문 박사(PhD) 졸업생을 배출하는 틴달은 이들이 R&D에 바로 투입될 수 있도록 '산업 준비형' 교육 과정을 설계했다. 틴달의 휴 스미디 사업개발총괄은 "산업계는 이제 단순히 학사 수준이 아닌 R&D 역량을 갖춘 석·박사급 고급 인력을 필요로 한다"며 "저희 박사 졸업생의 80%가 기업으로 진출하고 나머지가 학계에 남는 것이 그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아일랜드는 산업 현장의 수요와 공급 미스매치를 해결하기 위해 특정 산업 수요에 맞춘 정밀한 교육 정책을 운영한다. 일례로 아일랜드 정부는 지난 5월 발표한 국가 반도체 전략의 일환으로 '인력 수요 예측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는 앞으로 어떤 기술 인력이 얼마나 필요하고 대학이 배출 가능한 규모는 어느 정도이며 추가 재교육이 필요한 분야는 어디인지 등을 정밀하게 분석한다. 이를 통해 아일랜드는 단순히 인재를 '양산'하는 것을 넘어 산업 현장과 긴밀하게 협력해 '맞춤형 인재'를 육성하는 선진적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외교부까지 동원한 '인재 유치' 전략

아일랜드는 적극적인 인재 육성 정책을 통해 '나라가 인재를 길러 기업을 부르고, 기업이 다시 인재를 키우는' 견고한 선순환 구조를 완성했다.사진은 아일랜드 더블린에 위치한 더블린대학교(UCD) 마이클 스머핏 대학원(Michael Smurfit Graduate Business School)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을 경청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성아 기자



미래 성장 동력을 건 아일랜드의 눈은 해외로도 향해 있다. 아일랜드는 지난해 발표한 '글로벌 시티즌 2030' 전략을 통해 국제 학습자, 연구자, 혁신가들에게 '첫번째 선택지'가 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를 위해 외교부와 고등교육기관 등이 협력해 전 세계 주요 거점에 인재·혁신 담당관을 배치하고 해외 인재를 적극 발굴·유치하고 있다.

또 아일랜드 정부는 '글로벌 탤런트 아일랜드' 프로그램을 전면에 내세워 과학·연구 분야에서 전 세계의 우수 연구 인력과 떠오르는 젊은 인재들을 자국 연구 기관으로 끌어들이는 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정부는 이들이 아일랜드 땅에 안정적으로 정착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막대한 규모의 연구 자금은 물론, 정착 비용까지 파격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아일랜드는 이를 통해 '나라가 인재를 길러 기업을 부르고, 기업이 다시 인재를 키우는' 견고한 선순환 구조를 완성했다. 이 같은 선진적 인재 전략은 곧 다국적 기업의 투자 확대로 이어졌다. 글로벌 기업들은 잇따라 아일랜드에 둥지를 틀며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현지에서는 고학력 외국인 인력을 적극적으로 채용하며 아일랜드가 '세계 인재 허브'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실제로 아일랜드는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과 지난해 법인세율 인상(연 매출 7억5000만유로 이상 다국적 기업 대상, 12.5%→15%)을 단행했음에도 FDI가 오히려 증가했다. IDA의 지난 상반기(1~6월) 투자 승인 건수는 179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37% 증가했다.

데릭 핏제럴드 아일랜드 투자개발청(IDA) 한국·일본 지사장은 "IDA는 고품질·고부가가치 FDI를 유치하는 데 있어 흔들림 없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