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시스 EQ900, 제네시스(DH), 쏘나타(LF), 투싼(TL) 그릴.(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제네시스 EQ900, 제네시스(DH), 쏘나타(LF), 투싼(TL) 그릴.(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라디에이터 그릴, 혹은 프론트 그릴.

내연기관의 작동에 따른 부품을 냉각시키기 위한 일종의 ‘통풍구’지만 어느새 차량의 시각적 이미지를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가 됐다. 특히 같은 브랜드 모델들의 전체적인 외관을 통일시키는 ‘패밀리 룩’이 일반화되며 그릴디자인은 브랜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한 표시가 됐다.


이 때문에 자동차의 다른 디자인 요소들이 트랜드를 쫓아 변할 때도 그릴 디자인만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BMW의 ‘키드니 그릴’이다. 인간 몸의 두 개의 ‘신장’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 이름의 그릴은 세로로 길어지고 짧아지거나, 그릴 바의 개수가 늘어들거나 줄어드는 변화는 있었지만 지난 1933년 출시된 ‘303’모델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BMW의 차량과 궤를 같이했다.

BMW i8. BMW의 패밀리룩을 따르지 않은 미래형 디자인임에도 라디에이터 그릴은 기존 키드니 그릴 형태다. /사진=BMW 제공
BMW i8. BMW의 패밀리룩을 따르지 않은 미래형 디자인임에도 라디에이터 그릴은 기존 키드니 그릴 형태다. /사진=BMW 제공


현대자동차도 ‘그릴’에 디자인 정체성을 넣기 시작했다. 디자인 철학 ‘플루이딕 스컬프처 2.0’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릴 모양대로 6각형이라는 뜻의 ‘헥사고날 그릴’이라고 이름붙였다.


제네시스(DH)에 처음 적용돼 세간에 호평을 받은 헥사고날 그릴은 이후 쏘나타, 투싼, 아반떼에 이르기까지 현대차 전 모델을 아우르는 ‘디자인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했다. 아슬란에는 기존 ‘가로 바’ 형태에서 ‘세로 바’ 형태로 바꿔 출시하긴 했지만 6각형의 형태는 여전했다.

하지만 ‘제네시스’를 고급차 브랜드로 독립 출범하면서 현대차에는 딜레마가 찾아왔다. 독립된 브랜드이니 만큼 독립된 디자인 정체성을 가져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동시에 ‘제네시스’란 이름으로 출범하는 첫차이니 만큼 글로벌 성공을 거둔 DH와 일관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헥사고날 그릴의 시작이 DH였다는 것이다. 제네시스 브랜드는 DH로부터 시작된 ‘플루이딕 스컬프처 2.0’를 벗어날 순 없었던 셈이다.

이 고민의 흔적이 묻어나는 것이 ‘제네시스 EQ900’의 그릴이다. EQ900 출시 이전인 지난 11월 4일, 현대차가 공개한 EQ900의 실루엣 모델의 그릴은 헥사고날 형태였지만 그물 형태의 매쉬그릴이 적용돼 있었다. 이 때문에 지난 8월 공개한 콘셉트카 ‘비전 G’의 모습에 흡사해 보였다. 하지만 이후 실제로 출시된 EQ900은 기존의 DH와 같은 가로 바 형태였다. 아무래도 최고급 세단에 매쉬그릴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EQ900' 실루엣 모델. 매쉬 그릴이 눈에 띈다. /사진=임한별 기자
'EQ900' 실루엣 모델. 매쉬 그릴이 눈에 띈다. /사진=임한별 기자


결국 EQ900의 그릴은 기존 현대차의 헥사고날 그릴과 비슷한 형태로 출시됐다. 한눈에 봐서 쏘나타, 투싼 등의 그릴과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상단부 모서리의 각도가 다르다는 점 정도다.

대신 제네시스는 ‘크레스트 그릴’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크레스트’는 가문 등을 상징하는 문양을 말하는데 주로 방패모양의 무늬를 가운데 두고 칼이나 동물 등이 장식된 형태다. 기존 헥사고날 형태의 ‘육각형’ 보다는 ‘방패’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이름으로 보인다.


제네시스 측은 “제네시스에 패밀리룩으로 적용되는 ‘크레스트 그릴’은 현대차의 ‘헥사고날 그릴’과는 다른 정체성을 표현해 나갈 것”이라며 “EQ900에서는 헥사고날 그릴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차후 출시되는 제네시스 차종에서는 점차 더욱 고급스럽고 강렬한 인상으로 변화해 나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