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고소한’ 보금자리 지어요
People / 이현욱 광장건축 대표
김창성 기자
3,222
2016.10.30 | 07: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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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단독주택 하면 넓은 집만 생각해요. 그런데 그 틀을 제가 깬 거죠. 작지만 알찬 단독주택도 있다는 걸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땅콩집이 탄생했습니다.”
◆“통일되면 건축가가 돈 많이 벌 거야”
이 대표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대회에 나가면 곧잘 큰 상도 받는 화가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와 집안 형편 때문에 예술고 진학을 포기하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수학을 좋아해서 이과를 왔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진로선택에 고민이 많았죠. 그나마 제가 좋아하는 그림과 연관된 게 건축과밖에 없었어요. 게다가 몇년 뒤 통일이 되면 건축가가 할 일이 많아져서 돈을 많이 벌 것이라는 담임선생님 말에 건축과로 진로를 정했죠.”
이 대표는 당시 건축가가 돈 되는 직업으로 통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통일이 되면 북한 땅 개발을 위해 건축가들이 많이 필요할 것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져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만약 미대로 진학했다면 인생이 잘 안 풀렸을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담임선생님의 조언과 그나마 본인에게 맞는 적성, 그가 건축과를 선택한 이유는 이게 전부였지만 그는 대학생활이 즐거웠다고 한다.
“건축과에 와서 설계도면을 매일 그렸는데 제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랑 별반 다를 게 없었어요. 적성에 맞다고 느끼니깐 금세 흥미가 생겼고 내 길이구나 싶었죠.”
땅콩집 하나로 대한민국에 작은 집 열풍을 몰고 온 화제의 인물치고 건축가로서 그의 시작은 다소 의외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건축가 김원 선생과의 만남은 오롯이 그의 선택과 열정에서 기인한다.
◆“무작정 찾아갔지만, 인생을 걸었다”
광장건축 홈페이지에는 흥미로운 소개글이 하나 있다. 이 대표가 유명 건축가이자 당시 광장건축 대표였던 김원 선생을 찾아가 무작정 일하게 해달라고 해서 일자리를 얻고, 몇년 뒤 그에게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광장건축 대표에 오르게 된 내용이다.
“대학교 2학년 때 무작정 찾아갔어요. 학비도 벌어야 해 이왕이면 학업과 연관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김원 선생께 일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내일부터 당장 나오라고 하셨어요.”
광장건축에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그의 말은 상상 이상으로 그를 힘들게 했다. 밤을 새는 건 일쑤고 주말도 없었다. 건축 모형을 만들면 김원 선생은 다시 만들라며 냉정하게 부쉈다.
이 대표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원 선생은 일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이들을 다 받아주셨다고 한다. 하지만 힘든 건축의 세계에서 버텨내는 건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라고 강조한다.
“저도 일 배우러 찾아오는 친구들 다 받아줍니다. 그런데 거의 못 버티고 제풀에 꺾이죠. 성공하고 싶다면서 금방 흥미를 잃고 뛰쳐나갑니다. 김원 선생께서 말씀 하시기를 청년들이 인생을 걸었다고 하는데, 인생을 걸었으면 그렇게 쉽게 포기 못한다고 하셨죠. 저는 인생을 걸었고 힘들었던 시간은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인생을 걸었더니 자동으로 운이 찾아온 걸까. 남들은 5수 10수하는 건축사 시험을 그는 한번에 통과했다. 무작정 광장건축을 찾아가 현장에서 다양한 실무를 쌓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건축가로서 더 단단해졌다.
◆“채우기보다 비우는 게 더 어렵다”
몇해 전 이 대표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 땅콩집은 사실 외국에서는 ‘듀플렉스홈’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흔한 주택이다. 그는 ‘듀플렉스홈’의 의미가 국내 소비자에게 제대로 통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껍질을 쪼갰을 때 두개의 알맹이가 나오는 ‘땅콩’에서 착안해 1집에 2가구가 살 수 있는 ‘땅콩집’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어느날 친한 친구가 찾아와 아파트에 살면서 층간 소음 등으로 딸이 집에서 맘껏 뛰놀지 못하는 게 마음 아프다고 고민을 털어놨죠. 그래서 제가 같이 단독주택 짓고 살자고 했더니 어떻게 그 돈으로 집을 짓냐고 놀라더라고요.”
이 대표는 ‘땅콩집’을 지어 2가구가 살 수 있는 방법을 건축가들은 다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고 낯설었다. 이에 이 대표는 단독주택은 넓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일반인에게 작지만 알찬 단독주택도 있다는 걸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책을 써서 ‘땅콩집’을 알리고 직접 집을 지어 친구와 거주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한달 만에 집 짓는 매뉴얼을 만들었죠. 지금은 전국에 500채가 넘는 땅콩집이 있어요. 단독주택 짓는 게 어렵지 않다는 걸 알려서 기쁩니다.”
‘땅콩집’으로 유명인사가 됐지만 그는 ‘옆집 아저씨’ 같은 편안한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낮췄다.
“집 안에 무얼 가득 채울지보다 어떡하면 더 비워낼지가 더 힘든 고민이죠. 그래서 더 저렴하고 더 작고 효율적인 집을 지을지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합니다. 사람들이 건축가를 어려워하는데 동네 부동산 아저씨 찾아가듯이 저한테 오세요. 어려운 부분을 함께 고민하는 게 건축가로서 저의 의무입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5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이현욱 광장건축 대표는 몇해 전 우리나라에 땅콩집 열풍을 몰고 온 주인공이다. 자신의 건축적 역량을 집결해 땅콩집을 만들기까지 수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를 푸근한 옆집 아저씨 같은 건축가라고 소개한 이 대표를 만나 그의 삶과 건축가로서의 철학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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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욱 광장건축 대표. /사진=임한별 기자 |
◆“통일되면 건축가가 돈 많이 벌 거야”
이 대표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대회에 나가면 곧잘 큰 상도 받는 화가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와 집안 형편 때문에 예술고 진학을 포기하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수학을 좋아해서 이과를 왔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진로선택에 고민이 많았죠. 그나마 제가 좋아하는 그림과 연관된 게 건축과밖에 없었어요. 게다가 몇년 뒤 통일이 되면 건축가가 할 일이 많아져서 돈을 많이 벌 것이라는 담임선생님 말에 건축과로 진로를 정했죠.”
이 대표는 당시 건축가가 돈 되는 직업으로 통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통일이 되면 북한 땅 개발을 위해 건축가들이 많이 필요할 것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져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만약 미대로 진학했다면 인생이 잘 안 풀렸을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담임선생님의 조언과 그나마 본인에게 맞는 적성, 그가 건축과를 선택한 이유는 이게 전부였지만 그는 대학생활이 즐거웠다고 한다.
“건축과에 와서 설계도면을 매일 그렸는데 제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랑 별반 다를 게 없었어요. 적성에 맞다고 느끼니깐 금세 흥미가 생겼고 내 길이구나 싶었죠.”
땅콩집 하나로 대한민국에 작은 집 열풍을 몰고 온 화제의 인물치고 건축가로서 그의 시작은 다소 의외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건축가 김원 선생과의 만남은 오롯이 그의 선택과 열정에서 기인한다.
◆“무작정 찾아갔지만, 인생을 걸었다”
광장건축 홈페이지에는 흥미로운 소개글이 하나 있다. 이 대표가 유명 건축가이자 당시 광장건축 대표였던 김원 선생을 찾아가 무작정 일하게 해달라고 해서 일자리를 얻고, 몇년 뒤 그에게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광장건축 대표에 오르게 된 내용이다.
“대학교 2학년 때 무작정 찾아갔어요. 학비도 벌어야 해 이왕이면 학업과 연관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김원 선생께 일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내일부터 당장 나오라고 하셨어요.”
광장건축에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그의 말은 상상 이상으로 그를 힘들게 했다. 밤을 새는 건 일쑤고 주말도 없었다. 건축 모형을 만들면 김원 선생은 다시 만들라며 냉정하게 부쉈다.
이 대표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원 선생은 일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이들을 다 받아주셨다고 한다. 하지만 힘든 건축의 세계에서 버텨내는 건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라고 강조한다.
“저도 일 배우러 찾아오는 친구들 다 받아줍니다. 그런데 거의 못 버티고 제풀에 꺾이죠. 성공하고 싶다면서 금방 흥미를 잃고 뛰쳐나갑니다. 김원 선생께서 말씀 하시기를 청년들이 인생을 걸었다고 하는데, 인생을 걸었으면 그렇게 쉽게 포기 못한다고 하셨죠. 저는 인생을 걸었고 힘들었던 시간은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인생을 걸었더니 자동으로 운이 찾아온 걸까. 남들은 5수 10수하는 건축사 시험을 그는 한번에 통과했다. 무작정 광장건축을 찾아가 현장에서 다양한 실무를 쌓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건축가로서 더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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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가 사는 땅콩집. /사진제공=광장건축 |
◆“채우기보다 비우는 게 더 어렵다”
몇해 전 이 대표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 땅콩집은 사실 외국에서는 ‘듀플렉스홈’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흔한 주택이다. 그는 ‘듀플렉스홈’의 의미가 국내 소비자에게 제대로 통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껍질을 쪼갰을 때 두개의 알맹이가 나오는 ‘땅콩’에서 착안해 1집에 2가구가 살 수 있는 ‘땅콩집’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어느날 친한 친구가 찾아와 아파트에 살면서 층간 소음 등으로 딸이 집에서 맘껏 뛰놀지 못하는 게 마음 아프다고 고민을 털어놨죠. 그래서 제가 같이 단독주택 짓고 살자고 했더니 어떻게 그 돈으로 집을 짓냐고 놀라더라고요.”
이 대표는 ‘땅콩집’을 지어 2가구가 살 수 있는 방법을 건축가들은 다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고 낯설었다. 이에 이 대표는 단독주택은 넓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일반인에게 작지만 알찬 단독주택도 있다는 걸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책을 써서 ‘땅콩집’을 알리고 직접 집을 지어 친구와 거주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한달 만에 집 짓는 매뉴얼을 만들었죠. 지금은 전국에 500채가 넘는 땅콩집이 있어요. 단독주택 짓는 게 어렵지 않다는 걸 알려서 기쁩니다.”
‘땅콩집’으로 유명인사가 됐지만 그는 ‘옆집 아저씨’ 같은 편안한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낮췄다.
“집 안에 무얼 가득 채울지보다 어떡하면 더 비워낼지가 더 힘든 고민이죠. 그래서 더 저렴하고 더 작고 효율적인 집을 지을지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합니다. 사람들이 건축가를 어려워하는데 동네 부동산 아저씨 찾아가듯이 저한테 오세요. 어려운 부분을 함께 고민하는 게 건축가로서 저의 의무입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5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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