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검찰 수사가 자금을 지원한 재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정경유착 정도에 따라 기업별 분위기가 조금씩 다른 모습이다. 

삼성·현대자동차·SK·LG 등 재계서열 상위 대기업 총수 10여명은 일단 참고인 신분으로 받은 검찰 조사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등에 대한 자금 지원 대가성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재계 안팎에선 조사를 받은 총수들에게 뇌물공여 혐의가 적용돼 조사를 받는 신분이 피의자로 변경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는 이미 일부 대기업 총수로부터 박근혜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에서 대가에 대한 논의 후 돈을 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롯데, 밀접도 높고 엎친 데 덮쳐

당초 일각에선 대기업들이 권력 실세의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자금을 건넨 것이라는 동정론도 나왔지만 대가를 의심할 만한 정황이 곳곳에서 포착되며 재벌들에 대한 여론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지난 17일에는 자본주의 파수꾼인 회계사 17명이 시국선언을 통해 “지금까지 경제범죄에 이뤄졌던 솜방망이 처벌이 자본시장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었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일이 부끄러움이나 죄의식 없이 이뤄졌다”며 “최순실과 그의 측근들과 거래해 탐욕을 추구한 재벌기업인들도 철저히 조사해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위기감이 큰 기업은 최대금액 지원과 함께 최씨의 딸 정유라씨에게 별도의 맞춤형 지원을 한 사실이 드러난 삼성이다. 이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강도 높은 소환 조사를 받은 상황에서 지난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주주총회에서 청와대 측이 국민연금에 찬성 의결권 행사를 종용했다는 내부 증언이 나왔다.


‘이건희→이재용’ 경영권 승계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양사 합병은 이재용 부회장 등 오너일가가 다수 지분을 보유한 제일모직의 가치는 높이 평가되고 삼성물산의 가치는 저평가됐다는 논란(합병비율 제일모직 1 대 삼성물산 0.35)이 제기되며 합병 추진 당시 삼성물산 지분을 가진 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 외국인 투자자, 소액주주 등의 반대에 부딪쳤다.

하지만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찬성하며 합병안이 통과됐고 이 부회장은 삼성그룹의 실질적 지주사 역할을 하는 통합 삼성물산의 최대주주 자리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민감한 사안에 대한 의사를 결정할 때 외부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에 넘겨 찬반 여부를 결정해온 기존 관례와 달리 내부 투자위원회 차원에서 결론을 내리면서 ‘밀실 찬성’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특히 세계적 의결권 자문업체의 반대 권고에도 불구하고 찬성표를 던져 의혹을 가중시켰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 측은 “제기되는 모든 의혹에 대해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만큼 지금 해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며 말을 아끼고 있지만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최순실씨가 지난 14일 새벽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마치고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사진=뉴스1
최순실씨가 지난 14일 새벽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마치고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사진=뉴스1

총수일가 비자금 조성, 횡령·배임 혐의 등으로 검찰의 대대적 수사를 받았던 롯데그룹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지난달 19일 신동빈 회장이 500억원대 횡령과 1250억원대 배임 혐의를 적용받아 불구속 기소된 상황에서 또 다시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았다.

신 회장은 올해 2월 박 대통령과 독대를 한 것과 관련해 지난 15일 검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후 이뤄진 개별면담에서 앞선 지원금 45억원 외에 추가지원금과 대가 등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K스포츠재단은 지난 3월 롯데 측에 70억원의 추가 지원금을 요청했고, 총수일가 비리에 대한 검찰 내사를 받던 롯데는 고심 끝에 추가금을 전달했다. 이 돈은 지난 6월 서울중앙지검 롯데수사팀의 압수수색 전날 돌려준 것으로 드러나 검찰의 수사정보 유출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이와 관련 재계 한 관계자는 “재단 기금 조성을 전후해 특정 기업의 민원을 정부가 해결해준 정황이 드러나고 있지만 정부의 경제활성화 노력과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검찰이 혐의를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진· 현대백, 피해봤거나 관련도 낮아

반면 최씨에게 찍혀 피해를 본 기업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표정이다. 특히 한진그룹의 경우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된 기업 중 최대 피해자로 꼽힌다. 재계서열에 맞춰 미르·K스포츠재단에 자금 규모를 차등해 지원했다는 의혹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진은 재계서열 10위권임에도 불구하고 10억원만 출연했다.

이는 한진보다 재계 순위기 낮은 LS(16억원), CJ(13억원), 두산(11억원)보다 적은 금액이다. 이후 조양호 회장은 지난 5월 석연찮은 이유로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지난 8월에는 업계의 예상을 깨고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대책 없는 법정관리행에 최악의 물류대란이 발생했지만 박 대통령은 “경영정상화를 위한 자구노력이 미흡했다”며 책임을 한진 측에 돌렸다.

유통업계의 최대 화두인 3차 서울 시내면세점 대전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참전한 대기업 5개사 중 현대백화점은 유일하게 이번 게이트에 연루된 정황이 없어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내심 안도하는 분위기다.

반면 롯데, 신세계, SK, HDC신라 측은 최씨 측에 자금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난 만큼 이번 게이트가 면세점 심사에도 영향을 끼칠 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