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바꾼 광장] 늘 피워온 '민주주의의 꽃'
장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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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은 뜨겁다. 촛불을 들고 모인 국민들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촛불혁명’으로 불릴 올 겨울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며 ‘광장’이란 공간에 집중한다. <머니S>는 2016년을 마무리하며 ‘광장’을 돌아봤다. 촛불정국뿐 아니라 일상에서 광장이 삶에 어떻게 기능했는지 살펴봤다. 세계사의 중심이 됐던 각국의 ‘광장’도 되짚어봤다. 이를 통해 광장이 가지는 경제·정치·사회적 의미를 재조명했다.
광장(廣場). 말 그대로 텅 빈 넓은 마당이다. 상점이나 화려한 건축물, 울창한 나무는 광장에 어울리지 않는다. 광장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람뿐이다. 광장에 모인 사람은 서로 의견을 공유하고 토론하면서 의제를 설정한다. 일종의 정치적 과정이 광장에서 수행된다. 따라서 광장은 ‘직접민주주의의 꽃’으로 평가받는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도 광장과 함께 흘러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광장은 변화한다. 소통하고 모일 수 있는 장소라는 광장의 사회적 기능은 온라인시대에 접어들면서 다양하게 확장됐다. 인터넷 포털게시판이나 커뮤니티는 전통적 광장을 ‘사이버광장’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모바일상에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발달은 대중의 의지를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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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9일 열린 6월 항쟁관련 시청 앞에 모인 이한열 열사 장례식 행렬 모습. /사진=뉴시스 DB |
◆역사의 흐름, 광장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사건은 보통 거리에서, 즉 광장에서 이뤄졌다. 어떤 특정 정치지도자가 이끈 것이 아니다. 국민의 개별 의지 하나하나가 모인 광장이 발원지가 되고 큰 흐름을 만들어냈다.
우리나라의 광장은 대한제국이 성립된 1897년 처음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명성황후를 암살한 일본군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1년 만에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나라의 기틀을 재정비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 때 고종은 덕수궁 대한문 앞(현 서울시청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선형 도로를 닦고 광장과 원구단을 설치했다. 이후 서울광장은 고종보호 시위, 3·1운동, 4·19혁명, 한일회담 반대시위 등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자리했다.
본격적으로 광장에서 국민의 열망이 분출된 사건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6월항쟁이다.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된 6월항쟁은 전국에서 연인원 500만명이 넘는 국민이 참여해 1987년 6월10일부터 약 20일간 진행됐다. 결국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포함한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는 국민이 광화문이나 시청 앞 광장에 자유롭게 모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시위는 광화문 일대 길목이나 거리에서 이뤄졌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시위대가 들어간 것은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고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있었던 7월9일 하루뿐이었다. 불과 29년 전까지만 해도 국민이 광장에서 권력자와 소통하는 행위 자체가 제한됐던 것이다. 그러나 6월항쟁 이후부터 광장에서 이뤄지는 시민 집회가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민주주의 역사를 대변하는 광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적도 있다. 지금은 공원이 된 여의도광장이 대표적이다. 박정희정권은 일제강점기 때 활주로로 쓰이던 여의도에 1972년 약 9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5·16광장’을 조성했다. 대중을 한데 모아놓고 정치적으로 선동할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된 빠른 의사소통이 오히려 반민주주의를 도왔던 꼴이다. 따라서 당시 여의도광장에서는 시민의 자발적 모임이 아닌 국가 공식행사나 관제시위 등이 주로 열렸다.
현택수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은 “광장은 또 하나의 언론매체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세력이 장악하려는 대상이기도 하다”며 “지배세력이 광장을 장악하면 그것은 폐쇄광장이고 저항세력이나 일반시민이 광장을 이용하면 열린 광장으로 분류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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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아고라. /다음 아고라 캡처 |
◆민심에 ‘힘’ 더한 사이버광장
광장의 기능은 모바일의 발전으로 더욱 커지는 추세다. 기존 광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물리적·시간적 거리를 넘는 소통을 만들어내면서 대중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뚜렷해졌다. 사이버공간에서 소통되는 공동의 관심사는 네티즌이 자발적인 네트워크를 빠르게 형성하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2002년 11월26일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압사당한 ‘미선이 효순이를 위한 촛불 추모행사’가 열렸는데 이는 한 네티즌이 인터넷을 통해 제안하면서 성사됐다. 이 집회는 첫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1만명으로 시작해 12월14일에는 10만명 규모로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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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에 피살된 김선일씨의 추모와 이라크 파병을 막기 위한 촛불집회도 인터넷에서 시작됐다. 당시 네티즌들은 애도를 표하는 의미에서 검은 리본(▶◀) 이모티콘을 달기도 했다. 아울러 지난 10월부터 진행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촛불집회에 10~20대가 많이 참석한 이유를 SNS를 통한 홍보 덕분으로 설명하는 의견도 있다.
이렇게 사이버광장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의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도 과거보다 치열해졌다. 온라인 토론광장으로 유명한 ‘다음 아고라’를 보면 여러 가지 주제로, 특히 정치적 사안을 두고 설전이 오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의견이 나오면 서명운동이 진행되기도 한다.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또 다른 커뮤니티를 만들어 결집하고 의사를 표출한다. ‘일간베스트’, ‘오늘의 유머’ 등의 커뮤니티가 대표적이다. 이 같은 온라인상의 정치 행동을 두고 학자들은 직접민주주의의 맹아가 싹튼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이버광장의 역기능도 분명 존재한다. 위정자들이 커뮤니티상의 댓글로 여론을 조성하려고 노력하는 점은 사이버광장의 위상이 그만큼 커졌다는 방증인 동시에 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대중도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한 사회학자는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광장의 속성상 익명의 테러범을 사전에 차단하기는 힘들다”며 “광장문화는 개인이 상식과 원칙을 존중하며 일탈행위를 상호경계할 때 잘 유지될 수 있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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