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이맹희 타계'가 남긴 3가지
김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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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가 장남’ 이맹희씨가 타계했다. 향년 84세.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삼성가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그룹 경영권에서 밀린 비운의 황태자가 바로 그다. 아버지인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로부터 경영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탓이다. 장남이라는 타이틀 아래 그가 쥐고 있던 경영권은 동생(삼남)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로 넘어갔다.
#. 그는 돌연 한국을 떠났다. 일본, 몽골, 중국 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방황하길 40년. 결국 그는 이국 땅 베이징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자식들 누구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이맹희 별세’라는 이 다섯글자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그는 CJ, 삼성을 넘어 재계와도 실질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삼성가 황태자에서 은둔생활까지, 기구한 운명을 살았던 고 이맹희씨. 지난 8월14일 지병인 폐암으로 비운의 생을 마감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마땅한 호칭이 없던 그의 이름 뒤에 'CJ그룹 명예회장'이라는 공식 직함이 붙었다. 장례 역시 CJ그룹장으로 치러졌다. 서울대학교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2000여명의 정·재계 인사가 방문하면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의 타계가 남긴 3가지를 짚어봤다.
◆ 하나, 비운의 황태자 꼬리표
가장 먼저 세간의 화두로 떠오른 것은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는 어쩌다 쫓겨난 왕세자의 삶을 살게 됐을까. 그의 운명이 처음부터 비극으로 꾸며진 것은 아니다. 한때는 그룹 내에서 17개의 직책에 이름을 올리는 실세이자 삼성가의 장남으로 후계자 1순위로 거론되던 인물이다.
그러던 그의 행보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66년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이다. 이른바 ‘한비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 삼성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가 인공감미료인 사카린 55톤을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온 뒤 팔려다가 적발된 일이다.
사건의 파장은 컸다. 이 일로 이병철 회장은 모든 현직에서 사퇴했고 한비 지분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이 회장의 빈자리를 메운 건 장남인 그였다. 아버지로부터 삼성을 일시적으로 넘겨받은 뒤 총수 역할을 대행했다.
이를 공식 후계의 행보로 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오히려 후계구도를 뒤바꾸고 가문에서도 내쳐지는 계기가 됐다. 결정적 배경은 이 회장이 다시 경영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청와대 투서사건. 이 회장은 장남과 차남이 투서의 주범이라고 믿었고, 이후 부자 관계는 영영 회복될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난 그는 결국 삼성의 후계자 자리를 동생에게 넘기는 굴욕을 맛봤다. 그 후 개인적으로 제일비료를 설립하며 자존심 회복에 나섰지만 그마저도 실패. 1980년대부터는 줄곧 해외와 지방을 오가며 삼성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재계를 대표하는 ‘비운의 황태자’. 그의 타계 뒤에 쓸쓸히 붙은 꼬리표다.
◆ 둘, 삼성家 화해 단초되나
은둔생활을 이어가던 그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지난 2012년 2월. 아버지 이 회장이 남긴 상속재산과 관련, 동생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2년간 유산 분할 소송을 제기하면서다. 그러나 1, 2심 모두 동생의 완승. 2년간 이어진 법적 분쟁은 그가 주변의 만류로 상고를 포기하면서 끝났다. 이후 양측은 서로의 관계에 대해 원론적인 입장만 반복할 뿐 별다른 접촉을 갖지 않았다.
그가 생을 달리하자 재계는 삼성과 CJ의 화해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의 빈소가 서울대학교병원에 마련됐고 초미의 관심사는 삼성家의 조문 여부에 쏠렸다. 예상과 달리 빈소가 차려지자마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홍라희 리움미술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등 범삼성가 사람들의 방문이 잇따랐다.
고인의 누나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여동생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과 장남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도 빈소를 찾아 애도를 표했고, 이튿날엔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김재열 제일기획 사장 부부도 조문 행렬에 동참했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면서 조문을 통해 삼성과 CJ 간에 화해의 계기가 마련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과연 삼성과 CJ그룹 간의 갈등이 ‘문상 화해’로 매듭지을 수 있을까.
◆ 셋, 가족묘 배제… CJ 선영 마련
삼성가의 선영이 있는 곳이냐, 아니냐. 그의 장지에도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일각에선 그가 아버지의 묘가 있는 경기도 용인 선영에 묻힐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다른 곳으로 정해졌다.
그가 영면한 곳은 CJ일가 사유지인 경기도 여주 연라동 일대. 그룹이 소유한 대형골프장 헤슬리나인브릿지와 인접한 곳이다. 아버지의 묘와는 50여㎞ 정도 떨어져 있다.
CJ 측은 발인 하루 전날까지도 고인이 용인 선영에 묻힐 수 있도록 삼성 측에 의견을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용인 일대 선영은 삼성가가 영구히 상속하게 돼 있는 땅으로 의미가 깊다. 이 땅은 지난 1984년 이래 이 회장 등 28명이 공동소유하고 있지만 고인은 명단에서 배제된 상황. 주검이 돼서도 가족과 함께 묻히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CJ그룹 측에서는 “선영이 있어도 향후 집안에 큰 공을 세우거나 한 사람들은 따로 장지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일각에서는 이번을 계기로 CJ그룹만의 독자적인 선영이 마련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았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9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 그는 돌연 한국을 떠났다. 일본, 몽골, 중국 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방황하길 40년. 결국 그는 이국 땅 베이징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자식들 누구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이맹희 별세’라는 이 다섯글자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그는 CJ, 삼성을 넘어 재계와도 실질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삼성가 황태자에서 은둔생활까지, 기구한 운명을 살았던 고 이맹희씨. 지난 8월14일 지병인 폐암으로 비운의 생을 마감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마땅한 호칭이 없던 그의 이름 뒤에 'CJ그룹 명예회장'이라는 공식 직함이 붙었다. 장례 역시 CJ그룹장으로 치러졌다. 서울대학교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2000여명의 정·재계 인사가 방문하면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의 타계가 남긴 3가지를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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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CJ그룹 |
◆ 하나, 비운의 황태자 꼬리표
가장 먼저 세간의 화두로 떠오른 것은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는 어쩌다 쫓겨난 왕세자의 삶을 살게 됐을까. 그의 운명이 처음부터 비극으로 꾸며진 것은 아니다. 한때는 그룹 내에서 17개의 직책에 이름을 올리는 실세이자 삼성가의 장남으로 후계자 1순위로 거론되던 인물이다.
그러던 그의 행보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66년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이다. 이른바 ‘한비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 삼성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가 인공감미료인 사카린 55톤을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온 뒤 팔려다가 적발된 일이다.
사건의 파장은 컸다. 이 일로 이병철 회장은 모든 현직에서 사퇴했고 한비 지분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이 회장의 빈자리를 메운 건 장남인 그였다. 아버지로부터 삼성을 일시적으로 넘겨받은 뒤 총수 역할을 대행했다.
이를 공식 후계의 행보로 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오히려 후계구도를 뒤바꾸고 가문에서도 내쳐지는 계기가 됐다. 결정적 배경은 이 회장이 다시 경영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청와대 투서사건. 이 회장은 장남과 차남이 투서의 주범이라고 믿었고, 이후 부자 관계는 영영 회복될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난 그는 결국 삼성의 후계자 자리를 동생에게 넘기는 굴욕을 맛봤다. 그 후 개인적으로 제일비료를 설립하며 자존심 회복에 나섰지만 그마저도 실패. 1980년대부터는 줄곧 해외와 지방을 오가며 삼성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재계를 대표하는 ‘비운의 황태자’. 그의 타계 뒤에 쓸쓸히 붙은 꼬리표다.
◆ 둘, 삼성家 화해 단초되나
은둔생활을 이어가던 그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지난 2012년 2월. 아버지 이 회장이 남긴 상속재산과 관련, 동생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2년간 유산 분할 소송을 제기하면서다. 그러나 1, 2심 모두 동생의 완승. 2년간 이어진 법적 분쟁은 그가 주변의 만류로 상고를 포기하면서 끝났다. 이후 양측은 서로의 관계에 대해 원론적인 입장만 반복할 뿐 별다른 접촉을 갖지 않았다.
그가 생을 달리하자 재계는 삼성과 CJ의 화해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의 빈소가 서울대학교병원에 마련됐고 초미의 관심사는 삼성家의 조문 여부에 쏠렸다. 예상과 달리 빈소가 차려지자마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홍라희 리움미술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등 범삼성가 사람들의 방문이 잇따랐다.
고인의 누나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여동생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과 장남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도 빈소를 찾아 애도를 표했고, 이튿날엔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김재열 제일기획 사장 부부도 조문 행렬에 동참했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면서 조문을 통해 삼성과 CJ 간에 화해의 계기가 마련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과연 삼성과 CJ그룹 간의 갈등이 ‘문상 화해’로 매듭지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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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사진제공=삼성그룹 |
◆ 셋, 가족묘 배제… CJ 선영 마련
삼성가의 선영이 있는 곳이냐, 아니냐. 그의 장지에도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일각에선 그가 아버지의 묘가 있는 경기도 용인 선영에 묻힐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다른 곳으로 정해졌다.
그가 영면한 곳은 CJ일가 사유지인 경기도 여주 연라동 일대. 그룹이 소유한 대형골프장 헤슬리나인브릿지와 인접한 곳이다. 아버지의 묘와는 50여㎞ 정도 떨어져 있다.
CJ 측은 발인 하루 전날까지도 고인이 용인 선영에 묻힐 수 있도록 삼성 측에 의견을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용인 일대 선영은 삼성가가 영구히 상속하게 돼 있는 땅으로 의미가 깊다. 이 땅은 지난 1984년 이래 이 회장 등 28명이 공동소유하고 있지만 고인은 명단에서 배제된 상황. 주검이 돼서도 가족과 함께 묻히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CJ그룹 측에서는 “선영이 있어도 향후 집안에 큰 공을 세우거나 한 사람들은 따로 장지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일각에서는 이번을 계기로 CJ그룹만의 독자적인 선영이 마련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았다.
고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은…
- 1931년 6월 20일생
-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경주 이씨)
- 서울 수송국민학교 입학-대구 수창국민학교 졸업
- 경북중학교(6년제)
- 동경농업대학 입학(1951)
- 동경농업대학 대학원
- 결혼(1956.12.1)
- 미국 유학(1957.2), 미시건주립대 대학원 경제학박사(공업경영학)
- 귀국(1960), 한일은행 근무
- 안국화재 이사(1964)
- 미풍산업 상무(1967)
- 삼성물산 부사장, 미풍산업 부사장, 성균관대학재단 상무(1968.2.)
- 중앙일보 부사장, 삼성문화재단 이사(1968.4.)
- 전자산업 착수(1968), 삼성전자 부사장(1968)
- 제일제당 대표이사 부사장(1968.10~1970.5)
- 1931년 6월 20일생
-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경주 이씨)
- 서울 수송국민학교 입학-대구 수창국민학교 졸업
- 경북중학교(6년제)
- 동경농업대학 입학(1951)
- 동경농업대학 대학원
- 결혼(1956.12.1)
- 미국 유학(1957.2), 미시건주립대 대학원 경제학박사(공업경영학)
- 귀국(1960), 한일은행 근무
- 안국화재 이사(1964)
- 미풍산업 상무(1967)
- 삼성물산 부사장, 미풍산업 부사장, 성균관대학재단 상무(1968.2.)
- 중앙일보 부사장, 삼성문화재단 이사(1968.4.)
- 전자산업 착수(1968), 삼성전자 부사장(1968)
- 제일제당 대표이사 부사장(1968.10~1970.5)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9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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